계미동경소진첩 ()

회화
작품
문화재
‘계미동경소진첩’이란 1703년 출생한 계미년 동갑내기들의 초상화첩이라는 의미이다.
정의
‘계미동경소진첩’이란 1703년 출생한 계미년 동갑내기들의 초상화첩이라는 의미이다.
구성 및 형식

『계미동경소진첩(癸未同庚小眞帖)』은 7폭의 초상화와 서문으로 이루어진 계첩(契帖)으로서 비단 바탕에 수묵채색으로 그렸다. 녹색 비단의 표지에 흰색 비단에 쓴 “계미동경소진첩(癸未同庚小眞帖)”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초상화 각 폭의 크기는 대략 세로 26.6㎝, 가로 34.5㎝이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품으로 201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용

모두 1703년(숙종 29), 즉 계미년에 태어난 문사들의 초상화로 엮은 특이한 형식의 동경계첩이다. 화첩에는 참판 이익진(李翼鎭, 1703∼?), 판서 조영진(趙榮鎭, 1703∼1775), 참판 이규채(李奎采, 1703∼?), 영의정 한익모(韓翼謨, 1703∼?), 부사 송진흠(宋晉欽, 1703∼?), 영의정 신만(申晩, 1703∼1765), 유언술(兪彦述, 1703∼1773) 등 7명의 반신초상(半身肖像)이 순서대로 실려 있다. 각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주인공의 관직과 성명을 묵서했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는 마지막 폭은 서문을 쓴 유언술로 생각된다. 이어서 1771년(영조 47) 10월 상순에 유언술이 쓴 서문이 4면을 차지하고 있다.

동경소진첩을 만든 경위와 의의에 대한 유언술의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小眞帖 중의 사람들은 한 해에 태어났고 한 나라에 살며 어려서도 좋아하는 것이 같았고 장성해서도 숭상하는 것이 같았으며 升沈榮落에 出處가 같았고 酸함甘苦에 氣味가 같아 태어나면서 부터 노년에 이르기 까지 같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 15명이 30년을 하루 같이 지냈으니 마음이 같지 않으면 그럴 수 있겠는가 소진첩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43세가 되는 1745년(영조21)에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帖中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직 젊어 혹은 벼슬하느라 분주하고 세상의 일에 빠져 소진첩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어언 수십 년 이래로 7명이 잇따라 사망하고 생존자는 다만 8명뿐이다. 마침내 生死에 마음이 움직여 각자 조그마한 초상화를 그려 소진첩을 만들려고 하였다. 소진첩이 완성되기도 전에 3명이 또 세상을 떠나 지금은 5명만이 백발로 만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인생사 이와 같도다. 같은 해에 태어난 자는 죽는 날도 당연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15명에서 8명으로 8명에서 5명으로 줄었고 5명도 모두 나이 70여세이니 죽을 날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소진첩중의 자손들이 초상화를 보고 그 마음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소진첩 만드는 일을 중지할 수 있겠는가. 8명의 초상화를 각각 이름 아래에 붙여 소진첩을 만들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서문으로 삼는다.”

유언술의 서문에 따르면, 8명의 초상화로 소진첩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현재 7명의 초상화만 남아 있으니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다만 초상화의 제작시기는 7명 중 신만의 몰년을 기준으로 볼 때 1765년 전후로 볼 수 있으며, 유언술의 서문을 쓴 시기가 1771년이기 때문에 1765년 전에 초상화가 그려졌다면 회갑을 기념으로 초상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배경은 1719년 숙종이 기로소에 입회한 것을 기념으로 11명의 기로신 초상화를 싣은 『기사계첩』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정면상인 이규채의 초상화를 제외한 나머지 6폭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이며, 녹색 혹은 분홍색 단령 차림의 반신상이다. 갈색 선으로 안면의 윤곽과 이목구비, 주름살을 그리고, 그 선에 잇대어 약간의 선염을 더해 굴곡을 표현하였다. 즉 음영 표현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이전인 18세기 전반의 초상화법이 적용되었으나 피부색이나 검은 반점, 주름살 등 각 인물의 외형적 특징이 살아있다. 또 초상화에 따라 세부 필치에서 차이가 발견되어 오랜 기간 동안 여러 화가가 나누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계미동경소진첩』은 전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동경계회도이고, 일반적으로 모임 장면을 담은 그림과 좌목으로 구성되는 정형화된 계첩들과 달리 초상화를 모아 꾸민 특이한 예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계회도 연구는 물론 초상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물에 해당된다.

참고문헌

『조선처대 기록화의 세계』(고려대학교박물관, 2001)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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