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높이 1.04m의 조형물로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이다. 김인문(金仁問)의 공적을 새겼던 비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영귀루(永歸樓) 북쪽 받침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에 새겨진 글과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졌으나, 네 발로 힘 있게 바닥을 딛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거북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네모난 대석 위에 거북을 조각하고, 거북의 등 한가운데 비신을 끼워 넣을 수 있게 직사각형의 비좌(碑座)를 깊이 팠다. 이 홈 둘레에 양각된 연화문은 꽃잎 끝부분이 뾰족하게 들린 이 시기의 전형적인 연꽃 모양이다. 비신을 꽂았던 비좌 양 쪽에는 탑에서 볼 수 있는 기둥을 표현하였다.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으며, 목선을 따라 다섯 줄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새겼다. 눈 둘레에는 얕게 구름무늬로 장식했고, 수염이 새겨진 아래턱 부분 양쪽에도 날렵하게 구름무늬를 장식하여 상서로운 짐승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강조했다. 강하고 날카로운 5개의 발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다.
등에는 역시 낮은 부조기법으로 큼지막한 육각형의 귀갑(龜甲)을 같은 크기로 새겨 기하학적 엄밀성이 보인다. 각각의 귀갑 안에는 다시 갑층(甲層)을 층층이 조각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귀갑 전체에 가장자리 끝부분을 따라 구름무늬를 돌리고, 그 바깥쪽에 다시 연속된 구슬무늬[連珠文]를 새겨 장식성을 높였다. 이러한 문양들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신성한 동물로서 만년을 산다는 거북의 품격을 강조하고 비의 영원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서악동 귀부는 김인문이 사망했을 당시인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에 비석과 함께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귀부만 남아 있지만, 태종무열왕비와 함께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비신-이수의 형식으로 구성된 한국 비석의 초기 예로 가치가 높다. 이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는 9세기 이전 비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부이며, 당당하고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통일 전후의 기상을 잘 전해주는 조각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