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해방 전후 마을 입구의 우산각 자리로 옮겼다가 도난당한 후 다시 찾아 현재의 위치에 안치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1966년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2000년부터 2003년까지 3차례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 조사단이 일대 지표조사를 했다. 그러나 이 석불의 원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조사 당시 발견된 유물과 석불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석불좌상은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대좌는 상대석과 하대석을 갖추고 있으며 현지에서는 중대석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대좌와 석불간의 비례가 맞지 않아 원래부터 한 세트로 같이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배는 없으며, 정면을 향한 불좌상의 양 옆과 뒷면에 또 다른 불상을 조각하여 사면불로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든 사면불로 보기는 어렵다.
암질이 약한 화강암을 써서 불상 전면에 마멸이 심하고, 돌꽃과 이끼로 뒤덮여 원형을 알기 힘든 상태이다. 이 점은 대좌도 마찬가지이지만 오히려 지면에 가까운 하대석만은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라 제작 당시부터 같은 세트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파손과 마멸이 심하지만 머리, 신체, 팔과 결가부좌한 두 다리는 구분이 가능하다. 세부적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우나 타원형의 얼굴과 목, 신체에 딱 붙은 두 팔을 다리 위에 올려놓은 모습과 편단우견의 법의, 무릎에서 바깥쪽으로 펼쳐진 옷 주름이 간신히 보인다.
불상의 좌측면에는 오른손을 위로 들고 왼손에는 약합을 올려놓은 불좌상이 새겨졌는데 두광은 있지만 머리가 승형 민머리라서 보주를 든 지장보살일 가능성도 있다. 반대면의 조각은 얼굴이 거의 사라졌고, 신체의 마멸도 심해 알아볼 수 없다. 뒷면의 불상은 좌측면의 조각처럼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다. 육계가 분명한 민머리에 이목구비가 살짝 보이는 정도이며 오른손을 위로 들어올린 모습이다. 편단우견의 법의를 입었고, 옷 주름이 두껍고 강하게 남아있다.
사방 사면에 조각이 있다는 점 때문에 사면불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사방사불을 의도적으로 조각한 것은 아니다. 각 면의 조각수법과 마멸된 상태가 달라 여러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형상이기 때문에 이를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이나 경주 굴불사지 사면불과 같은 맥락의 계획적인 사면불이라고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바위덩어리 사면을 깎아나간 것이 아니라 먼저 정면의 불상을 만든 상태에서 그 규모에 맞춰 다른 면의 조각들을 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상대석의 연화에 작은 화불이 새겨졌는데 이처럼 앙련 꽃잎마다 화불을 새기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불상이 여러 번에 걸쳐 이전된 역사가 있어서 원래 불상의 대좌인지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불상과 상대석, 하대석의 규모와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같은 시대에 계획적으로 조성한 사면불은 아니지만 불상의 몸체를 이용하여 사면에 다른 불상을 새긴 우리나라 유일의 불상이라는 데 특장이 있다.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 조각수법과 신체비례, 대좌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판단된다. 사면불 추각(追刻)은 당시 곡성 불교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