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리 석조 여래 입상 ( )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조각
유물
국가유산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이칭
이칭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 중원 미륵리사지 석불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忠州 彌勒里 石造如來立像)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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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10.6m에 이른다. 고려 전기 충청도, 전북특별자치도 일대에서 많이 만들어진 대형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 하는 석조여래입상으로 1987년 사적으로 지정된 충주 미륵대원지의 주존불이다. 미륵대원은 거대한 돌을 거칠게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 만든 일종의 석굴사원이며, 석축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현지에서 ‘미륵당초(彌勒堂草)’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북향의 절터이며, 암벽을 파고 만든 석굴은 아니지만 석굴암과 같은 석굴 건축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된다.

내용 및 특징

모두 5개의 석재를 다듬고 쌓아올려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판석을 넓적하게 팔각으로 깎아 갓을 만들어 머리 위에 올렸다. 크기가 다른 돌들을 적당히 잘라 올린 신체는 어디에도 사실성이 없이 장승처럼 보인다. 옷주름도 최소로만 표현되어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정도이다.

원통에 가까운 신체는 지극히 단순하게 처리되어 상체와 하체의 구분이 없고, 손과 발만 알아볼 수 있다. 가슴 앞에 모은 손으로 둥근 약합(藥盒)을 들어서 약사여래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지 지명과 사찰지의 이름이 모두 미륵이기 때문에 미륵불로 신앙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충주 미륵리석조여래입상의 경우에는 수인(手印)이나 지물(持物)로 불상의 이름을 확정하기 어렵다. 소박한 신체에 비해 얼굴은 공을 들여 이목구비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양감이 전혀 없는 둥근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수평적인 눈, 넓적한 코와 입술이 치졸한 수법으로 딱딱하게 묘사되어 장승의 느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월악산에 이르러, 덕주공주는 제천 쪽에 덕주사를 짓고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1964년 지정)을 새겨 남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 북쪽의 덕주사를 바라보도록 석굴을 세운 뒤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10m에 이르는 규모, 장승처럼 표현된 신체, 경직된 얼굴 묘사, 정확하지 않은 도상(圖像)은 고려 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석불의 특징이다. 각 지방마다 앞다퉈 지방색이 반영된 거대 석불을 조성하던 고려 전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불상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도록』(전라남도, 1992)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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