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황동석
황동석
과학기술
개념
열이나 전기의 전도율이 크며, 연성과 전성이 우수한 적동색의 금속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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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구리는 열이나 전기의 전도율이 크며, 연성과 전성이 우수한 적동색의 금속원소이다. 원소기호는 Cu, 원자번호는 29이다. 부식에 대한 저항도나 산성에 대해 견디는 힘이 있다. 질이 연해 다른 금속과 잘 융합되는 성질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동광상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일대에 밀집 분포하고 있어 경남동광화대를 형성하고 있다. 구리는 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쓰이고 있어 경기 동향이 잘 반영된다. 구리는 동선·동판, 각종 전기전자제품과 재료, 기계 부품 재료, 합금재료, 군수품 재료, 건축재·동상 재료 등으로 쓰이고 있다.

정의
열이나 전기의 전도율이 크며, 연성과 전성이 우수한 적동색의 금속원소.
개설

원소기호는 ‘Cu’, 원자번호는 29, 원자량은 63.546, 녹는 점은 1,083℃, 비중은 20℃에서 8.93. 질이 연하지만 부식에 대한 저항도나 산성에 대해 견디는 힘이 있고, 다른 금속과 잘 융합되는 성질이 있다. 또한, 전성(展性) · 연성(延性)이 풍부하고 열과 전기의 전도율도 양호하다.

열농황산 · 초산 · 왕수(王水)에는 용해되나, 화학적으로 비교적 안정하고 그 변화도 표면에만 그치게 된다. 건조한 공기 중에서는 산화하지 않으나 수분이 많은 공기 중에서는 녹이 슬어 염기성탄산통((CuCO₃ · CuCOH)₂)으로 되는 녹청이 된다.

구리의 산출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동광석은 주로 황동석(黃銅石, CuFeS₂)이지만, 황동석 단일 광종으로서 산출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금 · 은 및 연 · 아연과 함께 수반되어 산출된다. 황동석 이외에도 자연동(自然銅)을 비롯하여 반동석(斑銅石, Cu₅FeS₄) · 남동석(藍銅石, 2CuCO₂ · Cu(OH)₂) · 테트라헤드라이트(tetrahedrite, 4Cu₂S · Sb₂S₃) · 적동석(赤銅石, Cu₂O) · 큐바나이트(cubanite, CuFe₂S₄) · 공작석(孔雀石, CuCO₃) · 크리소콜라(chrysocolla, CuSiO₃ · H₂O) 등이 산출되나 양적으로 보아 단독가행의 가치는 매우 적다.

『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문헌에 기록된 동광산으로는 강원도의 영월 · 평창 · 금성, 경기도의 영평, 충청북도의 충주 · 음성, 충청남도의 공주 · 진산, 전라북도의 용담, 경상북도의 진보 · 청송 · 인동 · 영해 · 의성 · 영덕, 경상남도의 계성 · 영산 · 김해 · 창원 · 함안 · 고성 · 밀양, 황해도의 금화 · 장연 · 수안, 평안북도의 구성, 함경남도의 갑산 등이 있다.

1941년 조선총독부지질조사소(朝鮮總督府地質調査所)의 『조선광물지(朝鮮鑛物誌)』에 기록된 동광산으로는 경기도의 포천 · 옹진, 충청북도의 괴산, 충청남도의 당진, 전라북도의 김제, 전라남도의 광양, 경상북도의 의성 · 달성 · 영천, 경상남도의 고성 · 창원 · 함안 · 밀양 · 동래, 황해도의 수안 · 송화 · 재령, 평안북도의 후창 · 희천, 함경남도의 갑산 · 삼수 · 장진, 함경북도의 함주 · 단천 · 덕원 등 27개가 있으며, 이들 광산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근대에 들어와서 새로 개발된 것들이다.

『조선광물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동광석은 주로 석영암맥(石英岩脈)에서 산출되며, 적동석 · 휘동석(輝銅石, Cu₂S) · 남동석 · 반동석 · 테트라헤드라이트 · 황동석 · 황석석(黃錫石 · Cu₂FeSnS₄) · 발레리아이트(valleriite, CuFeS₂) 등의 광종별로 주요 산출지를 기록하고 있다. 옛 문헌에 나타난 동광산들을 볼 때 전국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의 동광상들은 노두채굴에 의한 단순한 채광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 광산들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동광상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일대에 밀집 분포하고 있어 이른바 경남동광화대(慶南銅鑛化帶)를 형성하고 있다. 경남동광화대 이외의 지역에서는 동광물이 연 · 아연 · 철 · 중석 등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서 생산되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동광상의 유형으로는 열극충전맥상광상(裂隙充塡脈狀鑛床) · 접촉교대광상(接觸交代鑛床) · 각력파이프광상(角礫pipe鑛床) · 반암동광상(斑岩銅鑛床) · 현무암(玄武岩)내의 행인상자연동광상(杏仁狀自然銅鑛床)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동광상이 열수광상(熱水鑛床) 중의 열극을 충진한 맥상광상 형태에 속하며 대표적인 광산들로는 군북광산 · 함안광산 · 고성광산 · 구룡광산 · 동성광산 등이 있다. 접촉교대광상은 석회암질 암석과 이를 관입한 화성암체와의 접촉부분에서 생성되는데, 이의 대표적인 광산들로는 국전광산(菊田鑛山) · 울진광산(蔚珍鑛山) · 연화광산(蓮花鑛山) · 거도광산(巨道鑛山)이 있다.

각력파이프광상은 안산암질(安山巖質) 암석이나 석영몬조나이트 내에 형성, 발달된 각력파이프에 광상이 배태된 것으로서 일광광산(日光鑛山) · 달성광산이 이에 속한다. 반암동광상은 동광석의 산출상태가 광염상(鑛染狀) 내지 망상세맥형(網狀細脈型) 등으로 나타나서 저품위이면서 대규모적으로 개발될 수 있는 광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형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광산으로는 동점광산(銅店鑛山)과 금령광산(金嶺鑛山)이 있다. 현무암 내에 산점상(散點狀) 혹은 행인상으로 자연동이 산출되는 형태의 광산으로는 영양광산이 있다.

구리의 제련

황동석을 코크(coke)와 석회석과 함께 용광로에 넣은 뒤 송풍(送風), 가열하면 전부 용해되는데, 광석 중에서 철 · 규산 등은 석회석과 결합하여 광재(鑛滓)가 되어 상부에 떠오르므로 이를 걸러낼 수 있고, 동성분은 유황과 결합하여 하부에 가라앉아 피(鈹)가 된다. 이 피를 연동로(鍊銅爐)에 옮겨 다시 송풍, 용해시켜 불순물을 산화시키면 조동(粗銅)을 얻을 수 있다. 이 조동을 전기분해하여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정동(精銅)을 얻어내게 된다.

구리의 생산과 용도

구리는 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구리 개발이 경기동향에 잘 반영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세계경제가 침체됨에 따라 소비도 줄어들고 가격도 하락하는 등 불황기에 접어들었으나, 1984년부터 약간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광상이 경상남도 일대에 밀집 분포하나 소규모 맥상광체로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개발이 안되는 상황이고, 1978년 이후에는 주로 연 · 아연을 개발할 때 부산물로서 구리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에 따라 광산별 부존량도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어, 강원도의 제2연화광산이 전체 부존량의 25.8%, 경상북도 금령광산이 11.4%, 강원도 거도광산이 9.6%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광산들은 모두 9% 미만의 적은 부존량을 가지고 있다. 구리의 생산은 1965년 2만2000M/T까지 증가하였으나, 그 뒤 정부의 지원 감소와 생산비 상승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자 많은 광산이 폐광하여 생산이 줄어들게 되어, 1982년에는 불과 2,130t을 생산하였으며 가동 광산수도 7개 광산에 불과하였다.

또한, 1984년도에 예상한 국내 총매장량은 약 1928만4900M/T으로 되어 있으나 생산량은 약 2,000t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구리의 수요는 전원개발사업의 확대로 인한 전기동(電氣銅)의 수요 증대와 가공산업의 발달로 급속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13만t의 전기동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는 장항제련소와 온산동제련소의 가동에 따라 국내생산분은 수요의 1% 정도만을 충족시킬 뿐이고 나머지 99%는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구리는 전성 · 연성이 풍부하여 얇은 판과 선제조에 적당하며, 열과 전기전도율도 양호하여 전선 · 전기기구 등에 다량 사용되고 있다. 또한, 다른 금속과 잘 융합되는 성질 때문에 청동(靑銅) · 황동(黃銅) 등 각종 합금을 만들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구리가 주로 쓰이는 용도는 동선(銅線) · 동판(銅板), 각종 전기전자제품, 인쇄회로 기판(基板)재료 등의 전기전자제품재료, 청동과 특수합금으로서의 각종 기계부품재료, 열교환기 동튜브재료 등의 합금재료, 탄피 · 탄환의 군수품재료로 쓰이며, 이 밖에도 건축재 · 동상재료 등에 많이 쓰이고 있다.

구리광업의 역사

우리나라에서의 동광업의 기원은 금 · 은과 더불어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원전 1천년경부터 청동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낙랑시대의 유적에서는 동족(銅簇) · 동인(銅印) · 동기(銅器) 등이 발견되며, 김해 · 몽금포의 패총(貝塚)으로부터 동기가 출토되는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오래 전부터 동을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랑시대에서 삼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청동기의 수가 특별히 증가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장신구 · 마구(馬具) 중에 금 · 동 제품이 많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가면서 거대한 불상 · 범종 및 기타 불구류(佛具類)들이 동으로 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와 고려시대의 범종은 고대 일본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에는 신라동 · 고려동이라 하여 주나라와 원나라에 각기 수출된 사실(史實)이 있어 신라 · 고려시대의 동광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동은 일찍부터 중국에서 질이 좋은 청동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구리는 굳고 붉은 색이 나서 식기수저 등에는 모두 이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서도 고려동의 질이 우수하여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도 우리나라의 유(鍮:놋쇠, 황동)와 동을 사다가 화폐 · 그릇을 만드는 원료로 썼다 하였고, 『고려사』에 의하면, 958년(광종 9)과 959년에 후주(後周), 그리고 1262년(원종 3)에 원나라와의 동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5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동의 주조기술이 좋아서 일본인들이 주종(鑄鐘)을 의뢰하였는데, 『태종실록』에 의하면 1417년에 대마도주가 동 5백 근을 보내 주종을 부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채동(採銅) · 야동(冶銅)사업은 고려 5백 년 동안에 쇠퇴일로를 걸어 조선 초에 이르면 국산동의 산출은 전무한 상태이고, 채동 · 야동법 자체까지도 모르게 될 정도가 되는데, 15세기경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동광업은 쇠퇴기에 달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주조기술은 원료 자체의 고갈과 함께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다시 국산동의 생산이 증가하고, 16세기에는 동기 · 유기에 대한 일반수요도 크게 늘어나 동이 고가품으로 통용되기도 하였으나, 『중종실록』에 의하면 통용되던 동의 대부분이 왜동(倭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종 때에 이르러서 야동술 개량에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1564년(명종 19)에는 공조(工曹)의 장인들을 정수기(鄭壽麒)가 지휘하여 야동을 전장(傳掌)하게 한 일이 있다.

1566년에는 마침 조선을 찾은 일본인 기술자로부터 일본의 야동술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문에 발전을 보지 못한 듯하고 동질도 나쁘거니와 정부도 동 개발에 소극적이어서 1741년(영조 17)까지는 다시 왜동을 전용하다시피 하였다. 1678년(숙종 4)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으나, 국내에서 구리와 주석을 생산하기보다는 구리는 일본에서, 주석은 청나라로부터 각기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1751년(영조 27)에는 수안 · 영월 · 보은 · 안변 등의 광산을 개발하여 처음으로 제련을 시작하였으나, 방법이 미숙하여 실용적이지 못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안변의 영풍동(永豐銅)과 일본동을 혼합하여 비로소 주전(鑄錢)하였으나, 18세기 말경에는 관영동산(官營銅山)은 안변 한 곳뿐이고 국산동 개발은 미흡하여 여전히 왜동과 중국동을 수입하였다.

그 뒤 우리나라의 동광업은 부진하였으나, 근대에 들어와서 구하라광업회사(久原鑛業會社)의 갑산동점(甲山銅店)의 경영과 진남포제련소 · 장항제련소 등의 작업에 의하여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동광상들이 개발되었으나, 경기동향과 생산가의 상승요인에 의해 오늘날에는 동광산만을 개발하지는 못하고, 다른 광종을 개발할 때 부산물로서 얻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구리 제련의 사례와 유물

다른 금속을 섞지 않은 순수한 동을 순동이라고 하는데, 고대에 사용되었던 순동은 황동석이 산화되어 채광하기 쉬웠던 적동석(cuprite) · 휘동석(chalcocite) · 남동석(azurite) · 반동석(bornite) 등이 광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거나, 자연동 상태로 산출되는 것들이다.

자연동의 경우에는 그대로 두드려서 도구를 만들 수 있는데, 이렇게 만드는 방법을 냉동법(冷銅法)이라고 부른다. 순동에 비소 3%나 주석 10% 정도를 섞으면 순동과는 다른 단단한 청동으로 되며, 아연도 같은 효과를 낸다. 그리고 청동에는 주조 때 유동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을 가하기도 한다.

황동은 순동에 아연을 섞은 것이다. 구리에 비소나 주석을 가하는 것은 처음에는 광석 자체에 그러한 성분이 들어 있어 용동(熔銅)시에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청동 발견 이전의 순동사용시대를 순동시대(copper age), 또는 금석병용기시대(chalcolithic age)나 동석시대(eneolithic age)라 하고, 석기를 여전히 사용하면서 청동이 순동제품보다 많이 제작되기 시작한 시대를 청동시대라고 한다.

청동제품에 대한 화학적 · 물리적 연구는 최근에 들어 시작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청동은 크게 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구리 · 주석 및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청동이고, 둘째는 구리와 주석만으로 된 황동에 속하는 청동이며, 셋째는 구리 · 아연 · 주석 및 납으로 된 한국청동의 세 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동합금의 계획적인 주조가 적어도 기원전 9∼7세기경부터는 시작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뒤에 우리나라의 청동 주조기술은 아마도 중국인에게 배웠겠지만 한국인이 만든 같은 종류의 청동은 대부분이 중국 것과 합금의 성분비가 다른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분석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 기원전 3∼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동검은 대체로 구리 · 주석 및 납의 평균비가 75:16:9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 동경인 경우 평균비가 70:20:10인 데 비하여, 고마츠(小松)와 야마우치(山內)가 고려동검을 분석한 것은 75:15:10으로서 우리나라의 청동검과 비슷하다. 즉, 한국에서의 구리 · 주석 · 납의 합금으로 된 청동은 중국의 그것보다 주석이 적고 납의 함량이 뚜렷하게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청동은 적당한 양의 아연을 섞어주면 색깔이 부드러운 금빛을 띠게 되고 주조물의 성질도 좋아져서 장식품이나 의식용구를 만들기에 알맞는 합금이 된다. 그런데 아연은 420℃라는 낮은 온도에서 녹고 900℃에서 끓기 시작하여 증기로 달아나기 때문에, 1,000℃ 이상으로 가열해야만 되는 청동의 주조과정에서 아연을 넣어 합금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놋쇠는 유석(鍮石)이라는 말 외에 황동이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10세기경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아연 · 청동 합금은 어떤 기회에 우연히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놋쇠를 아연의 원광인 노감석(爐甘石)과 구리를 섞어 함께 녹여서 주석과 납을 더 섞어주면 되었을 것이다. 그 유물들이 발굴된 유적의 하나인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세종실록지리지』에서 노감석의 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우리나라의 무문토기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거듭된 노력 끝에 획기적으로 아연 · 청동 합금을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의 주조기술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은 거푸집〔鑄型〕의 제작이다. 기원전 3세기경까지는 사암제주형(砂岩製鑄型)을 써서 청동검과 동검 등을 주조하였음은 사암(砂岩)활석(滑石)으로 만든 거푸집들이 이 시기의 유적에서 출토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거푸집은 고대 금속공예 주조기술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발명의 하나였는데, 청동기를 부어 만드는 창작의 능력이 거푸집의 제작에서 거의 발휘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3∼2세기경에 만들어진 거푸집 중에는 두 짝의 한 거푸집으로 두 개 이상을 한번에 부어낼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 있다. 근래에 경기도 용인군에서 발견된 사암제 동검거푸집은 두 개의 같은 제품을 부어낼 수 있게 되어 있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나온 것은 한 거푸집으로 두 가지 구리단추들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후기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는 청동기의 주조에 납형(鑞型)에 의한 기술이 나타남으로써 섬세하고 부드러운 불상의 선을 살릴 수 있었다. 이 기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기술보다는 북방문화의 전통적 기술에 의하여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6, 7세기에 이르면서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금속공예, 특히 주조기술은 높은 수준에 달하였는데, 원자력연구소에서 코발트 60의 방사선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불상과 성덕왕신종(聖德王神鐘) 등을 투과촬영한 결과 그 당시의 주조기술을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시대에 주조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 1964년 지정)은 머리 중앙과 동체(銅體)에 공간이 있으나, 불순물이나 기포(氣泡) 같은 것이 없는 훌륭한 주조품임이 밝혀졌다.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소불상들은 대개 머리와 몸체 내부에 내형(內型)을 지지하기 위하여 구멍 몇 군데가 메워진 흔적이 있고 철제의 큰 쇠못이 들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1 지정)은 7, 8세기경 신라에서 주조된 높이 80㎝의 중형 불상인데, 머리부분과 몸체를 따로 주조한 다음 연결, 용접하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방법을 썼다. 내부는 철심(鐵心)과 못으로 내형을 지지하도록 하여 주조하였다. 그 주조기술은 현대의 주조기술에 못지않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금동불상의 주조기술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은 거푸집의 제작으로서, 이때에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불상의 선을 살리기 위해서 납형이 흔히 쓰였다. 백제의 주물기술자들은 일본에 이 기술을 가르쳤다.

6세기경에 일본에 건너가서 불상주조기술을 지도한 백제의 주사(鑄師)에 의하여 전승된 납형 제작법은 밀랍(蜜蠟)에 송진(松津)을 녹여 섞은 것으로 원형(原型)을 만들고 주입구(注入口)나 밀랍의 유출구를 붙여 거기에 고운가루〔細紛末〕의 주형토(鑄型土)와 진흙물〔粘土汁〕을 섞어 칠한 뒤 볕에 말려서 구운 다음 밀을 벗기면서 홍색으로 구워내고 그 주형의 공동에 용동을 주입하여 주조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금속기술은 불교가 환기시킨 종교적 열정에 의하여 그 기술이 점점 승화되었는데, 이는 불상을 거쳐 범종(梵鐘)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에 신라인에 의하여 점차 한국적인 특색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라인들은 어떻게 하여 현대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명종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은 흥미있는 일이며, 신라의 청동주조기술이 세계수준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고 있는 신라 범종 실물과 현존 주조기술을 관련시켜 주형 및 합금을 고찰하면 신라범종은 2개의 주형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상원사종(上院寺鐘)은 일체(一體)로 된 통틀형이고 공주 신라종은 조립식 주형으로서 봉덕사종(奉德寺鐘)과 동일한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당시에는 금속을 통한 물리적 · 화학적 기술로써 구현시켰으며, 그들의 기술은 이론보다는 공장적(工匠的) 기술이었고 원리적인 연구보다는 숙련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상원사종은 구리 83.87%, 주석 13.26%, 납 2.12%, 금 0.04%, 아연 0.32%, 은 0. 23%, 선림사종(禪林寺鐘)은 구리 80.2%, 납 12.2%, 아연 2.2%, 유황 0.14%이다. 신라종은 구리와 주석의 단순한 청동이 아니라 구리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이라는 데 또 다른 기술사적 의의가 있다. 아마도 음색을 좋게 하기 위해서 구리와 주석의 단순한 합금에 아연을 섞는 새로운 동합금을 창안해 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구리를 제련한 방법은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풀무의 왼편에 가로 풍공(風孔) 하나를 뚫어놓고 4면으로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며, 그 안에 작은 담을 쌓는다. 담 위에는 온돌같이 구들돌을 깔고 그 위에 재를 펴고 그 위를 진흙으로 바른다. 이 구들은 중간이 조금 깊어 4변이 높게 하여 그 높은 한쪽에 구멍을 하나 뚫어놓는다.

그리고 목탄을 구들 위에 쌓고 풀무를 박아서 5∼6시간 송풍을 계속하여 화열이 고조될 무렵에 동광석을 탄 위에 부으면 용련(熔鍊)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다 녹아서 구들 위로 흘러내리면 용동 위에 뜬 광재는 구들 한쪽에 뚫린 구멍으로 흘러 구들 밑으로 내려간다. 그 다음에 물을 뿌려 식힌 후에 구리를 꺼낸다. 납의 제련법도 이와 같다. 이 방법은 노상형식(爐床形式)에 속하는 건식 제동법인데 동광석은 제련이 쉽게 되는 자연동이나 산화동광을 써서 제동하는 방법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순조 때의 동제련기술은 다음과 같다. 동광석을 원형의 배소(焙燒)가마에서 배소를 하고 이 배소된 광석을 목탄과 함께 지상로(地床爐)에 장입하고 용련하여 동피(銅鈹)를 만든다. 이것을 다른 지상로에 옮겨서 나무와 목탄을 태워 다시 용해하여 제동공정을 거쳐 동을 만든다. 이 방법은 황화동광(黃化銅鑛)에서 동을 제련하는 진취법(眞吹法)과 유사한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동합금의 제조기술에 관한 언급이 8세기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시대로부터 구리와 주석만으로 된 동합금(75:25 또는 80:20)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놋쇠〔眞鍮〕는 구리에 주석을 넣어 합금으로 만드는데, 놋쇠 1근을 만들려면 주석 4냥에 구리 1근을 넣어 합금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방법은 우리나라의 유기 제조업자들이 최근까지 사용했으며, 그들은 구리와 주석을 4:1의 비율로 섞는 것을 전통적으로 지켜왔다.

이규경(李圭景)의 기록에 의하면 동합금의 제조법은 적동 6근마다 아연 1근을 서로 잘 섞어서 오지항아리에 넣고 녹인 뒤에 완전히 냉각하여 굳어졌을 때 꺼내면 가장 좋은 황동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아연광을 쓰는 경우에는 동 1근과 아연광 1근을 같은 방법으로 제련하면 황동 1.5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에 아연광으로 만든 황동은 그것이 적열(赤熱)되어 있는 동안에 망치질을 하며, 아연을 썼을 경우에는 노에서 꺼내어 식은 뒤에 망치질을 한다. 이렇게 한 뒤에는 황동의 색깔이 희게 되고 맑은 금속성 소리도 나지 않으나 이것을 줄로 갈고 닦아서 광을 내면 황동색이 되고 소리도 맑아진다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망치질 · 재용련(再熔鍊), 그리고 냉각시키는 방법 등으로 좋은 질의 동 합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현대기술과 같은 단조, 열처리 등이 경험적인 것인 것으로나마 발달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백동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인데, 가끔 아연을 포함하는 때도 있다. 이경석(李景錫)에 의하면 백동의 성질이 강해서 망치로 두들겨 가공하기 곤란하면 백석(白錫)을 넣으면 묽어진다고 하였다. 백동을 제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원형의 담을 한 길 이상 쌓고 그 안에 용로(熔爐)를 설치한다. 노에 비석(砒石)을 놓고 그 위에 구리를 놓는다. 그리고는 담 밖에 설치한 풀무를 밖에서 송풍하여 가열하면 녹아서 백동이 되어 항아리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냉각되기를 기다려 백동을 꺼낸다. 원형으로 담을 쌓는 까닭은 비소의 독한 증기가 사람에게 쏘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하여 만들어진 백동은 재차 정련하여 그 품질을 향상시켰다. 이때에는 백동을 완전히 녹지 않도록 하고 약간 응고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녹았을 때 꺼내며, 정련할 때마다 비상가루를 넣어주면 빛이 더욱 희어진다고 한다. 백동은 성질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가공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황동이나 아연을 넣는 일이 있으므로 그 색깔이 황색을 띠기가 쉬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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