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서정(曙汀). 서울 출신.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신흥예술인 활동사진에 감명을 받아 영화계에 뛰어들 결심을 하고 각색을 해오다가, 1924년에 단성사(團成社)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의 각색·감독을 맡아서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그 뒤에도 주로 각색·감독을 맡았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 감독한 <낙화유수 落花流水>의 각본을 썼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1938년의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부문의 10대 우수영화 중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28년부터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조선극장에서 무성영화 변사로 종사했는데, 장안 일류의 이름난 변사로 꼽혔다. 1928년에 그가 각본을 맡아 제작된 <세 동무> 또한 조선일보영화제 무성영화 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29년에는 자신이 각본·감독을 맡아 <약혼>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젊은 피아노 연주자의 비련의 사랑을 그린 극영화 <젊은이의 노래>의 대본을 쓰고, 감독하였다. 이 두 작품은 카프파(KAPF派) 영화의 목적의식에 저항하여 만들어진 순수극영화이다.
1931년에는 박정현(朴晶鉉)·나운규(羅雲奎)·이필우(李弼雨)·이창용(李創用) 등과 함께 카프파 세력에 대항하는 영화동호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자신의 각본·감독으로 <연애광상곡 戀愛狂想曲>을 만들어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그는 무성영화시대에 각본·감독·변사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선구자적인 영화인이다. <李重巨>
한편, 그는 대중가요 작사가·작곡가로도 큰 활약을 하였다. 1929년에는 <낙화유수>의 해설집 음반의 삽입곡으로 동명의 주제가를 작사, 작곡하여 이정숙(李貞淑)에게 취입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노래는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졌다.
1930년 최초의 본격적 직업가수라 할 수 있는 채규엽(蔡奎燁)에게 자신이 작사, 작곡한 <봄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곡은 노랫말이 민족정신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인해 발표 직후 일제에 의해 규제를 받았다. 같은 해 극영화 <암로 暗路>의 주제가를 작사, 작곡하여 음반으로 발표하였다.
1930년대 대중가요 초창기에 비전문음악인으로서 한국적인 서정적 대중가요의 방향 제시를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대표곡으로는 <낙화유수>·<암로>·<세 동무>·<봄노래>·<강남제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