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광수가 1947년 6월 면학서포에서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동명의 단편소설이 1939년 7월 『문장』에 실렸다. 출판사에서 신작이라고 광고했지만, 작품 구상과 스토리는 이 단편소설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조신의 꿈」을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외부 이야기가 내부 이야기인 꿈을 감싸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현실-꿈-현실의 서사 전개는 동양적 세계인식인 호접몽과 상통하는데, 세속의 덧없음이 꿈의 장치를 통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악몽으로 끝난 승려 조신의 일생은 작가의 친일 행적을 되비추는 역할을 한다.
해방과 함께 이광수는 그 직전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행적으로 인해 활동이 어려워졌다. 주1에 주2하며 한동안 침묵을 지킨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흥사단의 의뢰로 안창호의 전기 『도산 안창호』를 집필하면서이다. 자신감을 되찾은 이광수는 해방 후 첫 창작물인 「꿈」을 뒤이어 펴냈다. 오랜 침묵 후의 복귀작인 만큼, 「꿈」에 대한 독자의 기대와 관심은 컸다. 김동인에 따르면, 「꿈」은 전성기 시절 이광수의 작품을 압도하고도 남을 판매량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의 비판처럼 「꿈」은 친일 행위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사죄의 글은 아니었다. 「꿈」의 후속작인 자전 주3 「나」 또한 소년편과 청년편에 그쳐 민감한 대일 협력의 시기는 비껴갔다.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1948년 12월 「나의 고백」을 통해 친일 행위에 대한 주4와 항변의 글을 남기게 된다.
「꿈」은 주5 설화의 기본 줄거리는 살리되 허구적 인물과 사건을 첨가해 ‘조신의 꿈’을 더욱 전경화했다. 조신은 꽃을 꺾어준 인연이 있는 달례의 정혼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용선대사를 찾아가 달례와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대사는 법당에 들어가 사흘 동안 자신이 부를 때까지 나오지도 졸지도 말고 기도를 올리라고 말한다. 법당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다가 깜박 잠이 든 그의 앞에 연모하던 달례가 나타나 함께 도망칠 것을 제안하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관세음보살에게 머리를 조아린 후 태백산 깊숙한 곳에 숨는다. 그곳에 터를 잡고, 네 명의 자식을 낳아 단란한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동료 승려였던 평목이 찾아와 그를 협박하며 둘째 딸 달보고를 달라고 한다. 그는 부득이하게 평목을 목졸라 죽여 동굴 속에 버린다. 태수의 안내로 사냥을 오게 된 달례의 정혼자 모례는 조신의 집에 주6하게 되는데, 마침 사냥감인 사슴이 평목의 시신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바람에 시신 유기의 현장이 발각된다. 살인죄로 주7을 선고받은 조신은 삶에 대한 애착으로 죽임을 당하는 순간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다 누군가에게 엉덩이를 맞아 깨어난다. 용선대사가 웃으며 서 있고, 주8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 조신은 세속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지를 깨닫고 주9에 정진하여 조신대사의 경지에 오른다.
「꿈」은 액자식 주10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입몽-꿈-각몽-현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일상적 시간과 규범이 지배하는 외부 이야기와 달리 내부 이야기는 꿈의 몽상적 특성으로 인해 시간의 변조가 일어난다. 꿈에서는 조신이 달례와 함께 달아나 네 명의 자식을 낳고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사십 년이 흘렀지만, 일상에서는 단지 3일이 지났을 따름이다. 이러한 시간 차이는 꿈의 주관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상황과 욕구에 따라 꿈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조신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달례와의 주11을 꿈에서 실현하려 하지만, 결국 파탄을 맞게 된다. 일상의 안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주12가 다시 그에게 되돌아오는 불교적 주13의 교훈담이 이 소설을 틀 짓는다. 이는 친일 행위가 문제되던 작가의 처지와 겹쳐져 꿈의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남긴다.
꿈은 현실의 상관물로 현실의 대체 공간으로 기능하기는 하지만, 현실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부정성을 떠안은 채 언제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꿈에서나마 죄값을 치른다는 양심의 소리를 작가의 친일 행각에 비유하면, 꿈은 그의 죄책감의 반영일 수도 있으나 현실의 구제와 회복을 위한 알리바이로 기능하고 있다는 비판적 해석도 제기될 법하다. 다만 이 작품에 대한 논의가 풍부하지 않고 인상 주14에 그쳐 이 쟁점은 더 많은 연구와 숙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