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은 왕조시대의 최고 지배자이다. 최고 지배자는 고대국가에서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왕중왕이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이다. 고대국가의 왕권 강화와 집권 체제의 정비로 출현하게 되었다. 현존 자료를 통해 대왕 칭호의 사용이 확인되는 삼국시대 국가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이다. 고구려에서 대왕은 고구려 천하관에 따라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 질서를 조정하는 주재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대왕 칭호의 성립은 고구려와 백제가 4세기 대이고, 신라는 법흥왕대부터인 6세기 대이다. 고구려와 남북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국왕이 승하한 다음 시호로 대왕을 붙였다.
고대의 귀족국가는 하나의 중심 소국이 다수의 주변 소국들을 정복 병합해 영역을 확대되고, 소국 지배자의 전통을 계승한 족적 세력들을 재편해 합의제적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연맹왕국 단계를 거쳐, 연맹장의 권력이 강화되고 집권체제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의 강화 및 집권체제의 정비에 짝해 최고 지배자의 칭호도 변화하였다.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왕호(王號)의 변화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족적 성격을 온존한 여러 귀족세력들의 상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대왕이라는 칭호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는 태왕과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존 자료를 통해 대왕 칭호의 사용이 확인되는 국가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를 들 수 있다.
[고구려의 예]
① 고구려의 경우,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던 것은 「광개토왕비」 · 「충주고구려비」 · 「모두루묘지」 · 「광개토왕호우명」 · 「서봉총 출토 은합 명문」 · 「태왕릉전 명문」 등의 일차 자료에 보여지고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대왕이 시호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락대왕’의 호칭에서 광개토왕이 재위 중에도 대왕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에도 신라의 최고지배자인 매금(寐錦)과 형제관계를 맺는 국제질서의 주도자로서 고구려의 최고 지배자를 ‘고려대왕(高麗大王)’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5세기대 자료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대왕은 독립적 성격을 가진 귀족세력 위에 군림하는 ‘왕중왕’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중국적인 천하관인 중화사상을 변용해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질서를 조정하는 주재자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에서 대왕 칭호가 사용된 상한은 자료 부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안악 3호분의 수레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칭호를 고려하면 늦어도 집권체제가 구축되는 4세기대에는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예]
② 백제의 대왕은 관련자료가 많지 않아, 용례의 확인이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 사서인 『송서』 ·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458년경 개로왕의 휘하에 좌현왕(左賢王) · 우현왕(右賢王)이 존재했고, 490 · 495년의 동성왕의 휘하에도 다수의 왕과 후(侯)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백제왕은 곧 이들 왕과 후의 상위에 군림하는 대왕으로 지칭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대왕 칭호가 출현한 시기 역시 확정이 쉽지 않으나, 근초고왕 시대에 대대적인 열병을 거행하면서 황색기치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바, 이는 곧 자신이 ‘왕중왕’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백제도 4세기대에는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예]
③ 신라는 왕권의 강화 및 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몇 차례 왕호를 변경해 왔는데, 504년(지증왕 4) 신하들이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같은 해에 건립된 「포항냉수리신라비」에는 ‘전세이왕(前世二王)’ · ‘차칠왕등(此七王等)’이라는 구절이 보이고 있어, 왕이라는 칭호가 족적 성격을 온존한 유력 귀족들도 칭하는 용어였으며, 신라의 국왕은 아직 초월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봉평리신라비」에도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으로 기록하고 있어, 대왕 칭호가 성립되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534년(법흥왕 21)에 기록된 「울산천전리서석」 ‘갑인명’에 의하면 ‘갑인대왕사안장 허작(甲寅大王寺安藏 許作)’이라는 구절이 보이고 있고, 이듬해에 만들어진 ‘을묘명’에는 ‘성법흥대왕절(聖法興大王節)’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539년(법흥왕 26)에 기록된 ‘추명’에서는 법흥왕을 ‘무즉지대왕(另卽知大王)’으로 적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신라에서 대왕 칭호의 성립은 법흥왕 11년∼21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532년(법흥왕 19)에 상대등이 설치되는 등 집권체제가 정비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대략 상대등의 설치와 더불어 신라 국왕은 대왕이라는 초월적인 칭호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진흥왕 시대는 「단양적성비」와 순수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신료 위에 군림하는 신라 대왕의 지위가 공고해졌던 것이다.
[가야의 예]
가야에서는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다는 문헌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고령식 장경호에 ‘대왕(大王)’이라는 명문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자인 국왕도 대왕을 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