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방 별시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시험이다. 외방별시는 외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외방에서 시험을 보여 최종 급제자를 선발하는 문과와 무과의 한 종류이다. 외방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본래의 실시 목적과 관련하여 외방별시가 개설되는 지역이나 혹은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었다. 도과가 외방별시와 연결되는 지점도 바로 이 응시 자격과 관련되는데, 도과는 외방별시 중에서 응시 자격이 도(道)를 단위로 부여되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도과라는 명칭은 1664년(현종 5)에 실시된 함경별시에서 확인된다. 함경별시는 함경도가 멀리 떨어져 있어 국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기근이 심하기 때문에 인심을 수습하고 위로해주려는 목적으로 처음 함경도의 한 도를 대상으로 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시험이었다. 이에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함경도에서 실시된 도과는 이번 함경도 별시가 시초였다”라고 하였는데, 도과라는 명칭을 처음 언급함으로써, 함경도과는 함경별시와 같은 용어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함경별시에 대해 이긍익의 『 연려실기술』에 수록된 『등과총목(登科摠目)』에서 “ 북도과(北道科)는 이번 함경별시에서 비롯되었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함경도과는 함경도의 지역적 위치 때문에 북도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함경별시를 함경도과, 북도과라고 부르면서, 이후 평안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평안별시를 자연스럽게 평안도과, 서도과(西道科)라고 구분지어 칭했을 것이라 추론할 수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 국방상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유생을 위로하기 위하여 평안별시와 함경별시를 자주 실시해야 한다는 논의가 빈번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평안별시와 함경별시가 함께 실시된 이후에는 거의 주기적으로 동시에 개설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도 『문과방목』에서는 평안별시, 함경별시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다가 1838년(헌종 4)에 함경별시가 함경도과로, 1866년(고종 3)에 평안별시가 평안도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함경도과, 평안도과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