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일기(東槎日記)』는 통신 부사 임수간이 1711년(숙종 37) 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0개월간의 기록이다. 사행의 목적은 막부의 제6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정사는 조태억(趙泰億), 종사관은 이방언(李邦彦)이었다. 이 사행 기록은 본서 이외에 정사 조태억의 『좌간필어(坐間筆語)』와 압물통사(押物通事) 김현문(金顯門)의 『동사록(東槎錄)』도 있다.
2권으로 된 필사본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은 『동사록(東槎錄)』으로 되어 있다. 권1에 수록된 「전후통신사좌목」에는 1747년(영조 23)의 홍계희(洪啓禧)까지 수록되어 있으므로, 임수간(任守幹)이 1711년(숙종 37)에 초고를 정리한 뒤에 1747년(영조 23) 경에 최종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0개월간의 기록을 건(乾)과 곤(坤) 2권에 나누어 수록하였다. 건에는 「전후통신사좌목(前後通信使座目)」·「신묘통신사좌목(辛卯通信使座目)」·「동사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곤에는 「강관필담(江關筆談)」과 국서(國書) 및 서계(書啓), 하정물목(下程物目) 등을 비롯하여「문견록(聞見錄)」·「해외기문(海外記聞)」, 관백(關白)이 영객사(迎客使)에게 교시한 글, 「신정약조(新正約條)」, 저자가 일본에 갈 때 지인들의 전별시(餞別詩)를 정리한 「신장(贐章)」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권1의 「전후통신좌목」에는 1377년(고려, 우왕 3) 정몽주(鄭夢周)로부터 1747년(영조 23) 홍계희까지 약 400년간 사행에 다녀온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신묘통신좌목」은 사행에 참여한 정사 조태억(趙泰億) 이하 481명의 명단을 열거한 다음 돌아오는 일정을 기록한 것이다.
「동사일기」는 1711년(숙종 37) 5월 15일에 입궐하여 국왕을 알현한 뒤부터 이듬해 3월에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일기의 말미에는 ‘일기보(日記補)’와 ‘국서청개시말(國書請改始末)’이 나누어 첨부되었다. ‘국서청개시말’은 1711년 11월 11일부터 19일까지 일본이 보내온 국서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시말이다. ‘일기보’는 종사관의 기록에서 요점만을 골라 쓴 것으로, 1711년(숙종 37) 10월 15일부터 기록했는데, 내용 가운데 빠진 날도 많으나 전후 사건을 연결시켜 이어나갔다.
한편 권2의 「강관필담」은 에도시대[江戶時代] 중기의 주자학자이며 정치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와의 필담으로 중국의 역사, 서양의 문물, 양국의 정세 등에 관해 재치 있고 흥미롭게 기록하였다.
국서와 서계는 모두 8종으로 각 종마다 별폭(別幅)이라는 제목을 붙여 서로 주고받은 물품의 목록까지 명기하였다. 「문견록」은 종사관의 기록으로 일본의 지리·인물·풍속·제도·유희 등을 기록하였다.
「해외기문」에는 일본의 개국 이래 연혁과 대외 관계 등 역사를 대강 기록하였다. 「신정약조(新正約條)」에서는 대마도 사람으로 조선 여자를 범할 경우 율문(律文)에 의해 사형에 처한다는 조문을 확실하게 하였다. 「신장」은 저자가 사신으로서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들이 지어준 시 60여수를 수록한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사행 기록보다 체재와 내용에 있어서 훌륭하다. 일기에 소제목을 붙여 일목요연하게 한 점과 일기와 주요 기록을 분리해 분명히 한 점도 그렇지만, 특히 몇몇 기록은 원래 지은 자를 명기해 혼란이 없도록 한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음률·상수(象數)·병법·지리 등 다양한 면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