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전」은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 소설이다. 많은 이본이 전하며 계열 또한 복잡하다. 여러 짐승들이 모여 윗자리 앉기 다툼을 하는 쟁좌형(爭座型) 두껍전과 적강선관(謫降仙官)이 두꺼비의 탈을 쓴 선관형(仙官型) 두껍전, 해와 달의 정(精)을 노래한 일월형(日月型) 등이 있다. 조선 후기 하층민이 상층의 시식을 흡수하여 자기식대로 풀어내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1책. 국문 필사본 · 활자본. 여러 가지 이본이 있으며, 두꺼비가 주인공이 된 고전 소설들을 아울러 두껍전류라 할 수 있다. 삼광서림(三光書林) · 박문서관(博文書館) · 덕흥서림(德興書林) 등에서 활자본으로 나온 바 있다.
두껍전에는 「섬동지전(蟾同知傳)」 · 「옥섬전(玉蟾傳)」 · 「섬공전(蟾公傳)」 · 「섬자호생의설전(蟾子狐生議說傳)」 · 「섬설록(蟾說錄)」 · 「녹처사연회(鹿處士宴會)」 · 「노섬상좌기(老蟾上座記)」 · 「섬처사전(蟾處士傳)」 · 「장선생전(獐先生傳)」 등 이름이 다른 여러 가지 이본이 있다.
조선 인조 연간에 충청도 한산(韓山) 오룡산에서 장선생(獐先生)이 뭇짐승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토끼가 ‘윗자리 앉기’를 정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노루와 여우가 서로 다투는데, 두꺼비는 나이로써 정하되 문견(聞見)이 많고 적음을 따지자고 하였다.
여우가 천하를 편력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두꺼비는 이러한 편력과 아울러 고금의 역사 이야기로 응수하였다. 여우는 다시 하늘나라를 구경한 이야기와 천문 · 지리 · 시서(詩書) 등의 넓은 지식으로 맞섰으나, 두꺼비는 둔갑술 · 망국담(亡國談) · 병법 · 관상법 등 보다 넓고 깊은 지식으로 응수하였다. 이에 부득이 여우가 두꺼비에게 윗자리 앉기를 양보하였다. (「장선생전」)
이것은 동물을 의인화한 우화소설이며, 지은이와 지은 연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려대장경』의 「십송률(十誦律)」에 있는 사막새 · 원숭이 · 코끼리가 서로 나이로써 공경받기를 다투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또한 박지원(朴趾源)의 「민옹전(閔翁傳)」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선관형 두껍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조선국 일월산 아래 살고 있던 양옹(梁翁) 부처가 늦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하루는 못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두꺼비가 떠올라 함께 살기를 원하므로 데려왔더니, 조화를 부려 돈과 쌀과 보물을 솟아나게 하였다.
그리고 수양 아들이 되기를 원하므로 허락하였다. 하루는 근처의 이판서(李判書)댁 막내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므로 청혼을 했으나 완강하게 거절을 당하였다.
위협으로 우기고 치행(治行)을 차려 그곳에 당도했으나 신부가 신방에 들어와 자결하려 하였다. 이에 두꺼비가 칼을 내어 주며 자신의 배를 긋게 하자 두꺼비의 탈을 벗고 장부의 몰골이 되어 즐거운 신방을 차렸다.
날 샐 무렵에는 다시 두꺼비 탈을 쓰고 나오니 두 동서와 온 식구가 모두 비웃고 괄시하는 눈치였다. 세월이 흘러 장인의 회갑이 되자 수연을 베풀려고 동서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
두꺼비는 토신거사(土神居士)를 부리고 주문을 외어 짐승을 많이 잡았다. 다른 동서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잡은 짐승을 나누어 달라 하므로, 등에 도장을 찍고 모두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돌아오니 비웃음이 한결 더하였다.
회갑 날에는 탈을 벗고 옥골선관이 되어 처가에 이르러 두 동서를 자기의 종놈이라 하니 동서들이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등에 찍힌 도장 자국이 신표(信標)가 되어 이들을 결박하게 되었다. 남을 능멸하고 괄시한 죄목으로 매를 치다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혀 두꺼비 사위임을 아뢰고는 아내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이 이야기는 이본에 따라 한 장면이 더 부연된다. 장인의 수연이 끝난 뒤에 동서들과 과거길에 오르다가 동서가 두꺼비의 주머니를 훔쳐 중원(中原)으로 달아난 것을 다시 찾아와 함께 과거를 보았다. 두꺼비는 장원 급제를 하여 어전에서 탈을 벗고 선관임을 아뢰어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는 주로 영남 북부 지방에 많이 분포된 「두꺼비사위」 이야기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본에 따라 지소(地所) · 시대 · 배경 또는 사건 전개 · 등장인물 등이 다소 다른 것도 있다. 지소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된 경우도 있고 가공의 지명도 있다. 시대 배경은 영락(永樂, 1403∼1424) 또는 성화(成化, 1465∼1487) 연대와 연대 미상의 것이 있다.
「두껍전」에는 첫째로 여러 짐승들이 모여 윗자리 앉기 다툼을 하는 쟁좌형(爭座型) 두껍전과 적강선관(謫降仙官)이 두꺼비의 탈을 쓴 선관형(仙官型) 두껍전, 해와 달의 정(精)을 노래한 일월형(日月型) 두껍전인 「오섬가(烏蟾歌)」 등이 있다.
쟁좌형 두껍전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실천윤리와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권학 사상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관형 두껍전은 존귀한 이와 비천한 이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능멸과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작품에서 보이는 지식 자랑은 19세기 유서 편찬 등에서 볼 수 있는 지식의 집적 및 유통과 관련이 있다. 작품에서 활용되는 지식과 전고들은 당시 지식인이 보편지식을 아우르고 있으면서 나아가 민간에서 유통되는 민간적인 용법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이는 지식 확산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상층의 지식을 하층이 끌어 쓰는 양상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쟁좌형과 선관형은 본래 천상의 존재인 지혜로운 두꺼비가 하계로 내려와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간다는 원천 이야기가 분화되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월형 두껍전인 「오섬가」는 신재효(申在孝)의 판소리 사설로서, 까마귀와 두꺼비가 보고 들은 고금의 사랑에 대한 즐겁고 슬픈 이야기를 문답체로 엮어 여색(女色)을 경계한 것이다.
태양을 금오(金烏)라 하여 까마귀를 해의 정(精)이라 하고, 태음(太陰)을 옥섬(玉蟾)이라 하여 두꺼비를 달의 정이라 하므로, 이 해와 달을 아울러 오섬(烏蟾)이라 한다. 오섬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특히 칠정(七情) 가운데서도 음양의 정욕으로 일어나는 사랑의 즐거움과 슬픔의 이야기를 모아 엮었다.
이것은 일반 소설의 구성과 달리 사랑을 소재로 한 사건들을 연결한 것이다. 주로 중국의 역대 사실과 우리나라의 애정소설에서 소재를 택하였다. 순(舜)과 아황(娥皇) 여영(女英)의 원별(怨別), 하걸(夏桀)과 매희(妹喜)의 이별, 상주(尙紂)와 달기(妲己)의 이별, 유왕(幽王)과 포사(褒姒)의 이별, 주목왕(周穆王)과 서왕모(西王母)의 이별을 들 수 있다.
또 오왕(吳王)과 부차(夫差)의 망국한(亡國恨), 초패왕(楚覇王)과 우미인(虞美人), 한태조(漢太祖)와 척부인(戚夫人)의 이별, 한무제(漢武帝)와 이부인(李夫人)의 사별, 왕소군(王昭君)의 만고유한(萬古遺恨), 한성제(漢成帝)와 반첩여(班婕妤), 소중랑(蘇仲郎)과 하량교(河梁橋)의 이별,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픈 이별들이 전개된다.
또한, 우리나라 이야기로는 「춘향전」의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 「배비장전」의 애랑(愛娘)과 정비장, 「강릉매화타령」의 매화와 골생원의 이야기를 들면서 여색을 경계하였다. 여기에서 전개된 사실적(史實的) 소재는 대개 경국(傾國)의 여색을 경계한 것이라면, 허구적 소재는 오신명(誤身命)을 경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섬가」는 사랑의 즐거움과 슬픔의 이야기로서 몸을 닦고 집안을 정제(整齊)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르기까지 여색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