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2년(현종 13) 정충신의 후손 정도언(鄭道彦)이 유고를 수습·편집했고, 1699년(숙종 25) 5대손 정문흥(鄭文興)이 곡성현감으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그 뒤 7대손 정봉현(鄭鳳鉉)이 1894년(고종 31)에 중간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원경하(元景夏)의 서문과 권말에 후손 정문흥·정봉현의 발문이 있다.
6권 2책. 활자본.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권1에 시 31수, 권2에 소(疏) 11편과 차(箚) 3편, 권3에 서(書) 15편, 제문 1편, 축문 2편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권1에 교서(敎書) 3편, 제문 3편, 만시(輓詩) 13수, 권2에 세계(世系)와 연보(年譜), 권3에 시장(諡狀)·척록(摭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집 3편의 차자(箚子: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는 1630년(인조 8) 8월에서 다음해 8월까지의 1년 사이에 저자가 광량진(廣梁鎭)에 있으면서 작성해 올린 당시 군무(軍務)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는 정묘의 난(1627)을 일단 화의로 무마한 현 상황에서는 결코 척화(斥和)로써 그들의 감정을 다시 격동시킬 것이 아니라 세폐(歲幣)의 증액을 요구하는 그들의 청을 계속 들어줌으로써 적정을 늦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삼남(三南)에서 군대를 골라 북진(北鎭)을 방어하는 현재의 정책을 지양하고 용강(龍岡)·함종(咸從)에서 선천(宣川)·의주(義州)까지 서북 10개 지역을 각기 그 인근인 삼화(三和)·증산(甑山) 또는 철산(鐵山)·용천(龍川) 등 지역과 합축(合築)·합수(合守)하게 하여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고, 해면에서도 초도(椒島)·석도(席島)를 백령도(白翎島)와 같은 방법으로 거민을 입주시켜 두고두고 전수(戰守)에 대비하게 함으로써만 북로(北虜)에 장기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소소한 방략들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그 밖의 서(書)도 15편 거의 모두가 북변 대비의 전략적 내용이 담긴 것이다. 최명길(崔鳴吉)·강홍립(姜弘立) 또는 중국의 임유격(任遊擊)·황독부(黃督府)·장유격(張遊擊)·심부총(沈副摠)·이총부(李摠府) 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특히 강홍립에게는 금병(金兵)이 맹약을 어기고 우리 인마(人馬)를 약탈해간 데 대해 그들에게 잘 말해 돌려주도록 교섭하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