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736년(영조 12)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로 정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1739년에 영조의 뜻을 받들어 완소(緩少) 계열과 함께 정언(正言)으로, 붕당이 나라를 그르치는 화근임과 탕평책을 진언하였다.
아울러 신임사화로 화를 입게 된 조태억(趙泰億) · 조태구(趙泰耉) 등을 신설(伸雪)하는 데에 앞장섰다.
1742년 예문관제학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1743년 7월 청나라 고종의 북순(北巡)으로 유언비어가 많이 생기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들을 불러 자강책을 강론하게 할 때 폐사군(廢四郡)의 복설(復設)을 진언하였다.
이듬해에 이조참판으로서 판서 이기진(李箕鎭)과의 마찰로 이기진은 홍주목사로, 자신은 청풍부사로 전보되었다가 곧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1745년에 부제학으로 "호남의 크나큰 폐막(弊瘼)은 전정(田政)만한 것이 없는데, 전정의 문란은 오로지 은결(隱結)이 토호(土豪)들에게 넘어가 이민(吏民)이 백지징세(白地徵稅)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에 호남 사정에 밝다고 해 호남진전개량사(湖南陳田改量使)가 되었다.
임정(任珽) · 정우량(鄭羽良) · 오광운(吳光運) · 윤유(尹游) 등과 함께 조정에서 노론 · 소론만의 탕평인 소탕평(小蕩平)을 반대하고, 동서 · 남북을 다 포함한 대탕평(大蕩平)을 창도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옛 동료로 사감이 있던 이천보(李天輔)와 절교를 선언하니 이로부터 두 사람은 원수 같은 사이가 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로 인해 원붕(元朋) · 이붕(李朋)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노론들은 원경하가 탕평으로 자임하지만, 송인명(宋寅明) ·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아부해 경반(卿班)에까지 올랐고, 남모르게 남인과 소북들과 결탁해 자기 세력을 도왔다고 하였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은 원경하의 탕평 노력과 당인들을 고루 대하는 인품을 칭송하였다. 특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영조는 원경하의 탕평책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판돈녕부사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원경하가 죽자 왕이 친히 제문을 지었으며, 해당 부서에 명을 내려 치제(致祭)하게 하고 관재(棺材)를 관에서 지급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창하집(蒼霞集)』 1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