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원래는 만의사(萬義寺)라고 하였다. 1284년(충렬왕 10)을 전후하여 주지 정길(貞吉)과 현묵(玄默) 등이 중창하였다.
이 절이 천태종(天台宗) 사찰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천태종 진구사(珍丘寺)의 주지였던 혼기(混其)가 1313년(충선왕 5)에 이 절로 옮겨와서 크게 중창하고 법화도량(法華道場)을 연 뒤부터이다.
혼기의 뒤를 이어 의선(義璇)이 이곳의 주지를 잇게 됨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로서 기반을 굳혔으며, 충혜왕 무렵에는 묘혜(妙慧)가 주지로 있으면서 요원(了圓)의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간행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의 우왕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교대로 맡게 되었다. 충선왕 이래로 축적되어온 사전(寺田)과 사사노비(寺社奴婢)를 둘러싸고 현실적인 경제적 이익을 차지하려는 쟁탈이 노골화되었고, 조계종측에서 이를 차지하자 천태종측에서는 법에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자 절의 노비 약간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부(水原府)에 귀속시켰으며, 소유권은 다시 천태종측에 돌아오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위화도 회군에 공이 컸던 신조(神照)가 이 절의 주지가 됨에 따라 나라에서 사전 70결(結)을 급여하였고, 노비도 대대로 주지가 소유하게 공인함으로써 다시 한 번 사회적 보장과 경제적 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이에 신조는 1391년 정월에 7일 동안 소재도량(消災道場)을 개설하였고, 1392년 2월 천태종의 덕 높은 승려 330인을 초청하여 21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어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을 기원하였다.
조선시대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사명당 유정(惟政)의 제자 선화(禪華)가 오랫동안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우암 송시열(宋時烈) 묘의 이장지로 선정됨에 따라 1669년(현종 10) 현 위치로 옮긴 뒤 절 이름을 만의사라 하였다.
1796년(정조 20) 수원성곽이 중수되자 팔달문에 만의사의 종을 옮겨 달았다. 이 종은 1080년(문종 34)에 주조된 뒤 1687년(숙종 13)에 만의사 주지 성운이 무게 700근으로 개주(改鑄)한 것이다. 현재 정면 3칸의 대웅전과 산신각 ·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