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퇴당집』은 조선 후기 문신·학자 홍만조(洪萬朝)의 시·서(序)·제문·소(疏)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6권 6책의 필사본으로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연대를 알 수 없다. 간행하기 위한 정리본인 듯하다. 권1∼3에 시 1,344수, 권4에 인(引) 1편, 서(序) 4편, 발(跋) 1편, 상량문 3편, 비음기(碑陰記) 3편, 시장(諡狀) 1편, 묘갈명 4편, 제문 27편, 녹(錄) 3편, 계(啓) 1편, 권5·6에 소(疏) 12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6권 6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간행하기 위한 정리본인 듯하다.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에 있다.
권1∼3에 시(詩) 1,344수, 권4에 인(引) 1편, 서(序) 4편, 발(跋) 1편, 상량문(上樑文) 3편, 비음기(碑陰記) 3편, 시장(諡狀) 1편, 묘갈명 4편, 제문(祭文) 27편, 녹(錄) 3편, 계(啓) 1편, 권5·6에 소(疏) 12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시운이 청아하고 품격이 높으며, 저자가 외직(外職)에 오래 있으면서 그 지방의 명승·고적을 비롯한 풍물·세속 등 다양한 소재를 발굴해 묘사한 것이 많다. 각 지방에 재임한 시기와 순행한 지역을 구분해 「북새록(北塞錄)」·「기성록(箕城錄)」·「남정록(南征錄)」등 14개의 분단으로 정리하였다.
그 가운데 「북새록」은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관북지방의 세시풍속·풍물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를 발굴해 묘사한 것으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연사록(燕槎錄)」은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점 및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을 읊은 것으로 특이하다. 「연사록」은 홍만조의 문집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696년 7월에 출발하는 정조하사은사(正朝賀謝恩使)의 부사로 참여하여, 다음해 2월에 돌아왔다. 이때 동평군(東平君)이 정사로 가려고 했지만, 병으로 급히 교체되어 임창군(臨昌君)으로 바뀌었다. 연행사의 책임과 쓸쓸함이 그대로 배어 있는 작품이 깔끔한 시로 전하고 있다. 청나라에 대해 표현할 때에는 우회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곤 하였다.
「사귀인(思歸引)」은 번잡한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한적한 고향을 찾아가는 기쁨을 노랫조로 표현한 것이다. 「망우당시장(忘憂堂諡狀)」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도처에서 왜적을 대파해 큰 공을 세운 곽재우(郭再祐)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한 글이다. 「팔공산기우문(八公山祈雨文)」·「압록강제문」은 당시 국가와 주민의 안위를 위한 수호신으로서 강과 산을 숭상하는 풍속과 신앙을 대비한 글이다.
「관중잡록(館中雜錄)」은 사은부사로 연경에 갔을 때 고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연경에 대한 명칭의 시대적 변천사항과 『한서(漢書)』와 『위지(魏志)』 등을 인용해 봉천(奉天: 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금주(錦州: 현,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가 과거 우리의 국토였음을 고증하였다. 또한, 그 지방에 소속된 주현(州縣), 세금과 부역, 상가·풍속·복식 등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해 영토 관할권이 바뀐 뒤의 연경(燕京: 현, 중국 베이징시)의 변천된 모습을 밝히고 있다.
산문은 소의(疏議)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도 사소(辭疏)가 주류이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재소(再疏)까지 올린 경우가 14회 이상, 거기에 삼소(三疏)는 물론 육소(六疏)까지 나아간 경우도 2회나 있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 치열하게 상소를 올린 것인데, 이런 태도에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의 진퇴관(進退觀)을 엿볼 수 있다. 「진폐소(陳弊疏)」는 흉년이 들어 민생이 곤궁한데 탐관오리들이 횡행해 환부제도를 악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의 징벌과 개선을 청한 글이다. 이밖에도 궁중의 음모를 분쇄해 세자의 마음을 위로해줄 것을 청한 「인요환사청위안동궁소(因妖宦事請慰安東宮疏)」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