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암유고』는 한만유의 시문집이다. 7권 7책의 필사본으로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편년을 알 수 없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문체의 글이 있고, 조선 후기의 정치사·사회경제사 및 역사 인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7권 7책의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편년을 알 수 없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
권1에는 서(序) 12편, 기(記) 36편 등이, 권2에는 제발(題跋) 12편, 논(論) 14편, 설(說) 8편, 변(辨) 6편, 의(義) 2편, 잡저(雜著) 26편 등이, 권3에는 소(疏) 51편, 계주(啓奏) 17편 등이, 권4에는 서(書) 43편 등이, 권5에는 행장(行狀) 4편, 시장(諡狀) 1편, 전(傳) 4편, 친제문(親祭文) 4편, 치제문(致祭文) 5편, 제문(祭文) 13편, 애사(哀辭) 2편 등이, 권6에는 책(策) 4편, 서계(書契) 3편, 조(詔) 4편, 돈유(敦諭) 1편, 비답(批答) 1편, 표(表) 2편, 전(箋) 13편, 명(銘) 1편, 찬(贊) 2편, 상량문(上樑文) 1편, 장(狀) 24편, 공이(公移) 등이, 권7에는 비명(碑銘) 5편, 묘갈명(墓碣銘) 13편, 묘표(墓表) 2편, 묘지명(墓誌銘) 11편 등이 실려 있다.
서에는 송서(送序)가 많고, 이 중 연행 사절을보내는 서문이 많다. 「봉각연구시서(蓬閣聯句詩序)」는 지인들과 원주(原州)에 모여 시를 짓고 난 후에 쓴 것이다. 「건재창의록서(健齋倡義錄序)」은 임진란 때 김천일(金千鎰)의 행적에 대한 글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 · 박광옥(朴光玉) ·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했다는 내용이다. 「천세회시첩서(千歲會詩帖序)」는 집안 어른 14명이 모이니 나이가 천세에 가까웠고, 이에 시를 짓고 노닐었던 기억을 저자가 기록한 것이다.
기는 설악산 · 금강산 · 낙산사 등 영동 지방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다. 1801년(순조 1)에 강화유수로 재직할 때 진보(鎭堡)를 순찰하면서 그 역정(歷程)을 옮긴 13편의 글과 은산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행한 정사(政事)를 기록한 것도 있다.
제발에는 「서쟁신론후(書爭臣論後)」와 같이 「쟁신론」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서술한 작품도 있고, 「제연경서산행궁도(題燕京西山行宮圖)」, 「서외왕고여조문충공첩후(書外王考與趙文忠公帖後)」, 「제소문장소도(題蘇門長嘯圖)」처럼 그림과 글씨에 대한 내력과 자신의 느낌을 서술한 작품도 주목된다.
논은 주로 진(秦) · 한(漢) · 송(宋) 등 중국 역대 제왕의 치적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신하 등을 평한 글로서, 저자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 및 역사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후붕당론(後朋黨論)」은 붕당을 ‘시비지쟁(是非之爭)’과 ‘사정지별(邪正之別)’의 두 가지로 나눈 뒤, 구양수(歐陽脩)의 저술에서부터 ‘사정지별’이 있게 되었다는 것, 구양수의 붕당론은 우리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과 그 폐단을 지적하고,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잡저는 「백이전(伯夷傳)」 · 「하본기(夏本紀)」 등 중국사와 관계된 글들을 읽고 느낀 점을 적은 것과 「이기설(理氣說)」 · 「충서설(忠恕說)」 등과 같이 성리학과 관계되는 것의 두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소는 사직소(辭職疏)가 많은데, 토역진정(討逆陳情)도 함께 하여 정조(正祖) · 순조(純祖) 연간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계주(啓奏)는 피혐(避嫌)하는 내용이 많으며, 특히 세주(細註)로 전후의 사정을 밝히고 있어 당시의 정치 · 경제적 상황을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
서는 저자가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에 제반 업무의 처리와 관련해 관찰사에게 보낸 것이다. 장(狀)은 은산현감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상급 관청에 보고한 각종 보고 문서를, 공이(公移)는 같은 시기의 감결(甘結) · 유(諭) · 전령(傳令) · 완문(完文) · 절목(節目)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묘비명은 저자의 17대조 한악(韓渥), 저자의 차녀에 대해 쓴 「상녀광지(殤女壙誌)」, 어머니 정씨(鄭氏), 큰며느리 조씨(曺氏)에 대한 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요청으로 쓴 묘지명도 적지 않다. 그 대상 인물은 태조의 4번째 아들인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남언욱(南彦彧), 하만리(河萬里), 성지민(成至敏), 임연(林淵), 윤광우(尹光宇), 오윤함(吳允咸), 한위신(韓渭信), 오명하(吳明夏), 조성안(趙聖安), 박동묵(朴東黙), 이창급(李昌伋) 등이 있다.
이 밖에 충무공 이순신을 보좌했던 호남우수사(湖南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기록인 「이의민공승첩사적비(李毅愍公勝捷事蹟碑)」, 간성향교(杆城鄕校)의 내력을 기록한 「간성향교기적비(杆城鄕校紀蹟碑)」가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사 · 사회경제사 및 역사 인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