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 언론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이칭
일평(一平)
호암(湖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 5월 15일
사망 연도
1939년 4월 3일
본관
남평(南平)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주요 저서
한양조의 정치가군상|사상의 기인|사와 시의 도 강화
주요 경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자활 주필|중외일보사 기자|조선일보사 편집고문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95)
관련 사건
애원서(哀願書) 낭독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정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학자, 언론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문일평(文一平)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중퇴하고 태극학회 일어 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1년 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주요 활동

1906년 말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에 「자유론」 등을 발표하였다. 1909년 2월 메이지학원 보통과 4학년 시절 교내 연설회에서 ‘청년과 신세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0년 2학기 평안북도 의주 양실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로 전근하였고,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토요강습소에서 대중 강연 활동을 하였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안재홍(安在鴻) · 김성수(金性洙) · 장덕수(張德秀) · 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학계보』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고, 같은 해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13년 1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대공화일보(大共和日報)』사에 취직하여 논설을 쓰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동제사에서는 청년 유학생과 독립운동가 육성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이 설립되자 박은식 · 신채호 · 홍명희 · 조소앙 등과 함께 지도교수로 활동하였다.

1914년 4월 중국에서 귀국하였고, 1918년 박승빈(朴勝彬) · 오세창(吳世昌)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힘쓰고자 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여 3월 12일 종로 보신각에서 이른바 독립선언사의 일종인 「애원서(哀願書)」를 낭독하였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1월 6일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조선노동대회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 1월 잡지 『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 잡지 『 개벽』 1월호에 「갑자 이후 육십 년간의 조선」을 발표하였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 명의로 「전조선민중운동대회 개최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1924년부터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 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세 번째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역사 서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인 중 1명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2월 신간회 경성본부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기관지 『자활』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외일보사 논설부 기자 및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직하였다.

1928년 5월 잡지 『 별건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을 발표하여 ‘조선심(朝鮮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31년 조선일보사를 사직할 때까지 『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잡지 『 신민』, 『 신생』, 『 문예공론』 등에 조선 문화와 한글, 조선사에 관한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중앙고등보통학교 조선사 담당 교사로 전근하여 학생 · 청년의 역사 교육에 힘썼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1934년 5월에는 조선 문화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정다산의 위적 – 99년기에 제하야」를 발표하여 정약용의 업적과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1935년 7월 16일 다산 정약용 서거 백 주년 기념회를 개최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한글과 조선사에 관한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7년 7월 16일에는 조선방송협회 라디오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성 부근의 탐승에 취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 16일에는 신조선사에서 『 여유당전서』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3일 자택에서 급성 단독(丹毒)으로 사망하여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학문과 저술, 사상과 작품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 · 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 논술이 지니는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가 지닌 궁극적 목적이 역사 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자연 · 사적 · 예술 · 풍속 등 남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해 민족의 미래 개척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논술의 제목 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양조(漢陽朝)의 정치가 군상」, 「사상(史上)의 기인」, 「사(史)의 도(都) 강화(江華), 시(詩)의 도(都) 강화(江華)」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목을 취하였다.

셋째, 발표하는 글은 대부분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미관계 50년사」 등 몇 편은 예외이기는 하나, 대부분 문일평의 글은 단문이다.

넷째, 평이한 문체이다. 문일평의 사풍(史風)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소화해 이를 쉽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 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하였다. 이는 민족사를 우선 반성적으로 고찰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 외교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사에 나타난 파쟁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성리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에 결부하여 식민사학자들의 당파성 문제와는 궤를 달리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사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반면, 문일평은 민족사의 성찰과 반성에 역점을 두었다.

다른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역사 연구의 최종 결집으로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다. ‘조선심(朝鮮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에서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심’의 결정(結晶)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또,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자아(自我)의 재검토 · 재수립으로 보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외교 자세를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문일평의 사학 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구사(舊史) 비판을 통한 독특한 사론(史論)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史實)을 흥미롭게 재구성해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誇大)와 부회(附會), 독단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호암전집(湖巖全集)』

단행본

박성순, 『‘조선심’을 주창한 민족사학자, 문일평』(역사공간, 2014)

논문

최기영, 「문일평」(『한국사시민강좌』 15, 일조각, 1994)
최기영, 「호암문일평의 생애와 저술」(『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 하, 1994)
김광남, 「호암문일평의 외교인식」(『사학연구』 38, 1984)
김광남, 「문일평의 인물평에 대하여」(김광남, 『사학연구』 36, 1983)

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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