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間島) 용정(龍井) 출생.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서운(曙雲). 필명은 박진(朴進). 박인근(朴仁根)의 2남이다.
구산소학교(邱山小學校)와 용정 영신소학교(永新小學校)를 거쳐 1932년 용정중학을 졸업하였다. 1929년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적빈(赤貧)」이 입선되었고, 「혁명전선에 나서는 소년형제」(1930)와 「월야(月夜)」(1931)를 장제스[蔣介石] 정권 기관지인 『민성보(民聲報)』 한글판에 발표하였다.
졸업 후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잡초」·「두만강」·「우리는 탑 쌓는 무리외다」·「해란강」 등 50∼60편의 시를 발표하였고, 1932년 『예수』를 창간하여 종교논문 30여 편, 장편시조 「서정애곡」을 발표하였다. 1937년 『새사람』의 동인 겸 편집장을 거쳐 1938년 「순애보(殉愛譜)」가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39년 『박문』과 1940년 『삼천리(三千里)』, 1943년 『신시대(新時代)』의 편집부장을 역임하였고 광복 직후 『민성(民聲)』의 주간, 1949년 한성일보사의 취체역(取締役: 예전에 주식회사의 이사를 이르던 말) 겸 편집고문을 거쳐 자유문학가협회의 초대사무국장 및 중앙위원을 두루 거쳤다. 6·25중에는 박영준(朴榮濬)·김용호(金容浩) 등과 납북 도중 탈출하였고, 그 뒤 백마고지·지리산전투에 종군하였다.
장편소설로는 「순애보」 외에 「애로역정(愛路歷程)」(1941), 「애정무한(愛情無限)」, 「진리의 밤」(1948), 「피의 제전(祭典)」, 「구원(久遠)의 정화(情火)」(1953), 「별아 내 가슴에」(1954), 「대지(大地)의 성좌(星座)」(1957 ) 등이 있으며, 단편소설로는 「처녀지(處女地)」(1940), 「유방(乳房)」, 「오리온성좌」(1943), 「혈제(血祭)」(1945), 「유물철학」 등을 남겼다.
이 중 「죄없는 죄인」(1947), 「진리의 밤」(1957), 「순애보」, 「별아 내 가슴에」, 「자나깨나」(1958) 등이 영화화되어 대중화된 작가적 면모를 다졌다. 대중적인 흥미위주의 신문연재소설이 주류인 박계주의 작품 세계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사랑과 희생을 내세우는 점이 특징이다. 박계주의 작가적 명성을 굳힌 「순애보」가 그 대표적 예이다.
또한, 『문장(文章)』에 발표하였다가 검열 삭제된 단편소설 「처녀지」와 같이 순수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작품도 있다. 1962년 『동아일보』에 「여수(旅愁)」를 연재하던 중 필화사건으로 집필을 중단하였고, 1963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투병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