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필 ()

영화
인물
일제강점기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제작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서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제작자.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였고, 신교육은 별로 받지 못하였다. 구미의 신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1900년대 초에 이 나라의 전통예능을 공연, 보존하기 위하여 1904년 광무대(光武臺)를 설립,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스스로 박승필일행(朴承弼一行)을 조직하여 창무 · 재담 · 연극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극장 단성사(團成社)를 인수하여 경영자가 되어 당시 불길처럼 일어나던 연극계에 활기찬 무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뒤이어 활동사진 제작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하자 극단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金陶山)에게 제작비를 제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투 義理的仇鬪」(1919)를 제작하도록 하여 우리나라 영화사의 기점을 이루었다. 「의리적 구투」 외에도 세 편의 연쇄극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임성구(林聖九)가 이끌던 혁신단(革新團)과 이기세(李基世)가 이끌던 문예단(文藝團)에도 자금과 무대를 제공하여 연쇄극시대의 붐을 이루게 하였다.

또, 영화제작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23년에 이르러 조선극장의 소유자인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丹)가 1923년 「춘향전」을 만들자 큰 충격을 받고 단성사 촬영부를 설치하고 김영환(金永煥) 각본, 박정현(朴晶鉉) 감독, 이필우(李弼雨) 촬영으로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다. 이 영화의 제작진과 자본주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명실공히 최초의 우리나라 영화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유일한 민족흥행자본을 운영하여 나운규(羅雲奎)프로덕션(1929)을 비롯하여 이필우 · 이경손(李慶孫) 등에게도 프로덕션을 설립하게 하여 영화제작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박승필이 운영한 단성사는 우리나라 영화제작의 산실이 되는 한편 구미영화를 초기작품부터 수입, 공개하여 민중에게 영향을 끼친 바 지대하다.

그는 초창기 우리나라 연극과 영화계에 극장무대와 자금을 제공하였고, 특히 일본영화만이 득세하던 시기에 우리나라 영화제작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나라 영화제작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1969)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한진출판사, 1980)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