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가 스크린과 함께 등장한 것은 1900년대이다.
영화사(映畫史) 초기의 필름들이 차차 극적 구성(劇的構成)과 배우들의 등장으로 재미있는 줄거리를 지니게 되면서 관객들에게 그것을 알기 쉽게 해설할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미국이나 유럽 영화계에서도 변사의 등장을 볼 수 있었으나 곧 자막(字幕)과 무대의 반주음악으로 대치되었다.
변사의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주로 초기부터 구미영화(歐美映畫)를 수입하였던 동양권,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였다. 변사들의 유창한 줄거리 해설과 대사 등의 성대묘사는 작품내용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생생한 극적 감동마저 주었으므로 변사는 무성영화시대에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서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변사의 등장은 1910년 전후부터이다. 영화가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공개 상영된 것은 1903년부터이지만, 변사의 본격적인 등장은 극장가가 형성된 1910년을 고비로 해서이다. 상설영화관이 서울과 지방에 속출함으로써 변사의 직업적 기능이 확립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로 서울의 우미관(優美館)·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이 가장 활발하였다.
상설영화관은 대개 변사실을 두어 5, 6명의 변사를 전속으로 두고 있었으며, 무대 위에서의 해설은 2, 3명이 교대로 한 영화를 담당하였다. 영화가 상연될 즈음이면 악대의 전주와 함께 무대에 올라 먼저 전술(前述)에서 인사말과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알리고, 이어서 본편을 해설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무대의 꽃으로 화려한 인기를 누리던 변사는 무성영화시대가 지나가고 발성영화(發聲映畫, talkie film)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숱한 애환을 남기고 스크린 앞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35년에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된 이후 무성영화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변사의 활동은 발성영화시대가 된 뒤에도 무성영화가 재상영되는 기회마다 이어져 왔으며,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은 독립 이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이 상영된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