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4,101㎡.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추측되는 유적은 보문산(普門山)의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남쪽 경사면 7부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남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3단의 축대를 쌓았는데,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이다.
사역(寺域)은 아랫단에 1개소, 중간에 2개소의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주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가장 윗단으로 나뉜다. 아랫단에는 북으로 길이 10여m, 높이 1m에 이르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전면 6칸, 측면 2칸 건물로 추정되는 초석이 남아 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중간단은 파괴가 심하여 규모를 추정할 수 없다. 제일 윗단 앞에는 축대 바로 밑에 괘불(掛佛)의 지주(支柱) 한 쌍이 서 있어서 이곳이 금당(金堂)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높이 95㎝, 한 변 길이 16×35㎝인 두 개의 지주는 20㎝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사역 안에서 기와조각과 도자기조각이 많이 나오는데, 주로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어서 사찰의 경영이 주로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이어졌던 듯하다.
조선 말의 기록인 『도산서원지(道山書院誌)』에는 ‘丙辰丁巳年以 炭翁先生配停干川內 柳等浦山內 三面役夫…同月十五日 禹進士家財瓦薨 四面民丁及普門同學 高山寺 栗寺僧軍 拜八百餘名運入……(병진정사년이 탄옹선생배정간천내 유등포산내 삼면역부…동월15일 우진사가재와훙 사면민정급보문동학 고산사 율사승군 배800여 명운입……)’이라 기록되어 있어 보문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던 사실을 적고 있다.
보문사지의 동쪽 계곡에 석조(石槽)가 있으며, 주위에는 맷돌 1기, 물레방아 확2개, 세탁대 1개가 남아 있어 승군(僧軍)을 파견할 수 있었던 사 세(寺勢)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