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약 14,928㎡. 현재는 대부분이 논으로 개간되어 있어 사지의 확인이 어렵다.
다만 당시에 쌓았던 축대 일부와 초석 및 석조(石槽) 1개 등이 남아 있어 사지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곳에서 연주문(連珠文) 내에 범자(梵字)를 조각한 와당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보광사를 중창한 후 세웠던 중창비(重創碑)가 있었는데 1963년에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중이다.
비는 방형의 화강석재로 된 대좌(臺座) 위에 높이 197㎝, 너비 114㎝, 두께 23㎝의 편마암 비신을 세웠는데, 윗부분의 모서리를 깎아 귀접이를 한 규형(圭形)으로, 비신면의 각 모서리도 역시 깎아서 각(角)을 만들었다.
현재 이용된 비의 대좌는 본래의 것이 아닌데 대좌로 분리되어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비신에 있는 것을 보아 당초에도 대좌는 따로 분리되어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던 것 같다.
글자는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음각하였는데 비신의 주연부(周緣部)에 너비 7.5㎝ 내외의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보상화문(寶相花文)을 조각하였다. 비석면의 풍화가 심해서 완전한 파악은 어려우나, 전면은 1358년(공민왕 7)에 음서(陰書)한 것으로 위소(危素)가 찬하고 게왕(揭瀇)이 썼다.
원명국사(圓明國師)의 공적과 보광사의 중창내용을 적고 있으며, 후면은 1750년(영조 26)에 황폐된 사역을 복구하고 불탄 비각과 비를 다시 세우며 개각한 사실들을 적고 있다. 비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보광사의 규모는 5백칸이 넘는 웅장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