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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를 위한 무용 음악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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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봉래의는 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궁궐 잔치 때의 춤과 노래)를 위한 무용음악의 하나이다. 1445년 세종의 명으로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음악을 지칭한다. 악보는 『세종실록』에 전하며 춤사위에 관한 기록은 『악학궤범』에 전한다. 봉래의 음악은 <전인자>·<여민락>·<치화평>·<취풍형>·<후인자> 5곡으로 구성되었다. 봉래의는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변천을 거치게 되었다. 춤의 반주음악도 본래의 '봉래의' 대신에 다른 음악으로 바뀌었다. 현재 봉래의 정재와 그 반주음악의 전통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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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를 위한 무용 음악의 하나.
내용

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를 위한 무용 음악의 하나. 1445년(세종 27) 4월 세종의 명으로 권제(權蹏) · 정인지(鄭麟趾) · 안지(安止)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음악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정재 및 무용 음악의 총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음악은 「전인자(前引子)」 · 「여민락(與民樂)」 · 「치화평(致和平)」 · 「취풍형(醉豐亨)」 · 「후인자(後引子)」 등 다섯 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악보는 『세종실록』 권140∼145 사이에 전하며, 춤사위에 관한 기록은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5곡 가운데 「전인자」 · 「여민락」 · 「후인자」 등 3곡은 황종 · 태주 · 중려 · 임종 · 남려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으며, 시작음과 종지음이 모두 황종이다.

또한 「치화평」 1기 · 2기 · 3기는 모두 태주 · 고선 · 유빈 · 남려 · 응종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으며, 세 곡의 종지음과 시작음이 모두 남려이다. 그리고 「취풍형」 상하 2곡은 모두 대려 · 고선 · 유빈 · 남려 · 응종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는데, 「취풍형」 상에서는 시작음과 종지음이 모두 고선이지만, 「취풍형」 하에서는 시작음은 남려이고 종지음은 고선이다. 이러한 여러 악곡들은 32정간(井間)의 정간보(井間譜) 속에 율자보(律字譜)로 기보되었다.

세종 당시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쓰였을 경우에 「여민락」의 10장을 모두 연주하였고, 「치화평」은 1기 · 2기 · 3기 가운데 3기의 초장에서 16장까지와 종장만을 연주했으며, 「취풍형」도 초장에서 8장까지와 종장만을 연주했다. 그러나 성종 때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전인자」가 춤의 시작에서 연주되었고, 이어서 「여민락」이 연주되었다.

「여민락」의 연주에 맞추어 여기(女妓)들은 한문으로 된 해동장(海東章) · 근심장(根深章) · 원원장(源遠章) · 석주장(昔周章) · 금아장(今我章) · 적인장(狄人章) · 야인장(野人章) · 천세장(千世章) · 자자장(子子章) · 오호장(鳴呼章)을 노래 불렀고, 한 장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다른 춤동작을 계속했다.

「여민락」에 이어서 「치화평」 3기를 연주할 때에도 기생들은 국 · 한문으로 된 해동장(首章) · 불휘장(제2장) · 주국장(周國章, 제3장) · 적인장(제4장) · 칠저장(漆沮章, 제5장) · 상덕장(商德章, 제6장) · 블근새장(제7장) · 태자장(太子章, 제8장) · 봉천장(奉天章, 제9장) · 일부장(一夫章, 제10장) · 우예장(虞芮章, 제11장) · 오년장(五年章, 제12장) · 말ᄉᆞᆷ장(제13장) · 성손장(聖孫章, 제14장) · 양자강장(揚子江章, 제15장) · 도망장(逃亡章, 제16장) · 천세장(卒章)을 노래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치화평」 3기에 이어서 「취풍형」을 연주할 때에도 기생들은 국 · 한문의 해동장(수장) · 불휘장(제2장) · 주국장(제3장) · 적인장(제4장) · 칠저장(제5장) · 상덕장(제6장) · 불근새장(제7장) · 태자장(제8장) · 천세장(졸장)을 노래 불렀고, 「후인자」가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다.

이때 반주음악을 맡았던 음악인들은 월금(月琴) 2인, 당비파 2인, 향비파 2인, 대금(大笒) 2인, 장구 2인 등 모두 10인이었는데, 이들은 악기마다 1인씩 좌우로 나뉘어 정절(旌節) · 용선(龍扇) · 봉선(鳳扇) 등의 정재의물(呈才儀物)을 든 기생 앞에 앉아서 연주했다.

조선 초기의 「봉래의」는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변천을 거치게 되었고, 따라서 춤의 반주음악도 본래의 「봉래의」 대신에 다른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봉래의」 정재 연주 때 기생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조선 초기의 것과 같았다. 고종 때의 문헌인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은 「정상지곡(呈祥之曲)」(與民樂) ·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步虛子令) · 「치화평지곡(致和平之曲)」(鄕唐交奏) · 「취풍형지곡(醉豐亨之曲)」(歌曲의 弄樂) · 「계락(界樂)」 · 「향당교주」 · 가곡의 편조(編調) · 「하승평지곡(賀昇平之曲)」(향당교주)이었다.

「봉래의」 연주 도중에 기생들은 「오운개서조」에 맞추어 한문으로 된 해동장 · 근심장 · 원원장 · 석주장 · 금아장을 불렀고, 「치화평지곡」에 맞추어 한문의 적인장 · 야인장 · 천세장 · 자자장 · 오호장을 노래 불렀다. 이어서 기생들은 가곡의 농(弄)에 맞추어 국한문의 해동장과 불휘장을 불렀고, 「계락」에 맞추어 국한문의 주국장 · 적인장 · 야인장을 불렀으며, 가곡의 편(編)에 맞추어 국한문의 상덕장 · 적조장(赤鳥章) · 태자장 · 봉천장 · 일부장 · 성손장 · 천세장을 불렀다.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봉래의」 정재와 그 반주음악의 전통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악학궤범』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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