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화평」은 조선시대 세종이 창작한 궁중악무 「봉래의(鳳來儀)」 구성곡 중의 하나로 「용비어천가」 한글본을 노래한 곡이다. 조종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창작한 노래와 정재로 구성한 「봉래의」 중 한 곡이다. '전인자-여민락-치화평-취풍형-후인자'로 이루어진 모음곡 구성에서, 시작 악구인 전인자와 한문본 「용비어천가」 가사를 노래하는 「여민락」 에 이어 한글본 가사를 부르는 향악곡이다. 『세종실록』 「악보」와 『대악후보』에 악보가 실려있고, 국가 연례에 연주된 바 있으나, 지금은 연주되지 않는다.
「치화평」은 1445년(세종 27) 4월에 권제(權踶) 등이 지어올린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제작된 「봉래의」의 한 곡으로 정재와 함께 주7 곡이다. 1447년(세종 29) 『세종실록』 기록에 ‘처음에 임금이 용비어천가를 관현에 올려 느리고 빠름을 조절하여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을 제작하매 모두 악보가 있다’는 내용은 곡의 창작자가 세종임을 알려준다. 이후 「치화평」은 궁중의 주9 주8에서 사용될 곡으로 반포되었고, 선율과 가사는 『세종실록』 「악보」, 『대악후보』에, 「치화평무도」는 『악학궤범』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실제 연향에서의 쓰임은 조선 전기에 간혹 보이고, 조선 후기 순조, 고종 때에도 곡명이 언급되었으나, 전승의 지속성을 분명히 알기 어렵다. 조선 후기에도 「봉래의」는 연행되었지만, 「치화평」은 누락되었다. 현재는 연주되지 않는다.
『세종실록』 권140부터 수록된 「봉래의」 중 「치화평」은 '치화평 상(1)', · ‘치화평 중(2)’ · '치화평 하(상 3, 상4, 상5)'으로 기보되었다. 즉, 「치화평」 상중하(123)는 '만(慢) · 중(中) · 삭(數)', 삼기곡(三機曲)의 구조이며, 이 중에서 맨 마지막곡 '치화평 하'는 다시 세 부분(3, 4, 5)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세종실록』 악보의 「치화평」의 선율은 고려의 향악곡 「진작(眞勺)」을 치화평 가사에 맞게 편작한 곡이다. 전체 17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장은 가사 구의 수를 따라 3구 형식으로 되어 있다. 1장과 2장, 17장은 각각 시작 악구와 종지 악구로서 선율이 다르지만, 그 사이의 제3장부터 16장까지는 거의 같은 선율이 반복된다. 즉, 시작 악구와 종지 악구를 제외한 중간 부분은 유절 주5으로 되어 있다.
「치화평」을 「봉래의」 정재에서 연주할 때는 월금 · 당비파 등의 주10와, 향비파 · 향피리 · 대금 등의 주11 혼합 편성으로 연주하는 「여민락」과 달리 향악기로만 연주하였다. 조성은 남려궁(南呂宮) 평조다. 한편, 「치화평」을 출 때는 「용비어천가」 한글 가사 전곡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1장인 해동장부터 8장 도망장, 졸장 천세장만 사용되었으며, 『악학궤범』 권 5 '봉래의초입배열도'와 '치화평무도'를 참고하면 악기를 든 주12들이 춤 추는 주13를 인도하는 대형과 동선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치화평」은 세종이 주6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친제한 신악 중의 한 곡으로 『세종실록』 악보와 『대악후보』에 기보되어 전한다. 이 곡은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를 전래의 향악 선율에 얹어 완성했다는 점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와 향악 활용 의지가 융합된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또한 「치화평」 악곡 분석을 통해 고려 향악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