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도감(樂器都監)은 궁중 의례에 필요한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정조가 1776년(즉위년)에 경모궁((景慕宮)에서 사용할 악기는 도감을 설치하여 만들라고 명하였다는 주1에서 알 수 있듯이, 악기도감은 제작 수요가 발생했을 때 설치하였다가 임무가 종료되면 해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반적으로 악기 등 주악에 사용되는 기물을 제작하는 단독 기구로 설치되었지만, 1624년(인조 2)에는 주4 · 종묘 · 사직 및 각 주5에 쓰이는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제작하기 위한 ‘제기악기도감(祭器樂器都監)’이 통합 운영된 적도 있다.
악기도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기록은 악기조성청에 비해 매우 적어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기본적인 기능과 역할, 조직 운영 등은 악기조성청과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악기도감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424년(세종 6)에 악학도감에서 주6와 주7를 제작했으며, 이전에도 2번이나 악기도감을 설치했다는 주2 여기에서 세종의 음악 정비 사업이 추진되기 이전에도 국가 의례에 필요한 악기 및 의물의 수급을 도감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고려시대에 운영되었던 여러 도감 중에 악기도감의 명칭은 보이지 않으나, 국가 오례(五禮)에 사용되는 악기 및 의물, 복식 등을 공급하는 기구는 운영되었을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아악 정비가 시작되면서 악기도감에서는 1426년(세종 8)부터 3년 동안 528매의 편종과 편경을 다량 제작하였다. 이밖에도 세종 때에는 악기도감 외에 주10, 악기감조색(握奇監造色) 등이 별도로 운영되었는데, 이들 기관과 악학도감의 관계 등은 분명히 알기 어렵다.
조선 후기, 숙종 때부터 악기도감보다 악기조성청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한편, 악기도감과 악기조성청을 합친 ‘악기조성도감’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숙종 이후 악기조성청이라는 명칭이 공식화되는 상황에서도 각종 문서에서는 여전히 악기도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이런 관행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인조 때에 설치되었던 제기악기도감의 상세 내용은 『제기악기도감의궤(祭器樂器都監儀軌)』에 수록되었다.
악기도감은 체계적인 조직과 운영을 통해 국가 주11을 조화롭게 구현하는데 필요한 악기와 의물, 복식 등을 규범에 맞게 생산한 전문 음악 기구로 전승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 세종 때에는 이전까지 국내 제작이 불가능했던 편종과 편경을 다량 제작함으로써 아악 정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