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라는 명칭이 악기의 하나로 편입된 최초의 기록은 『 삼국사기』 「악지」에 나타난다. 삼현(三絃: 거문고 · 가야금 · 비파), 삼죽(三竹: 대금 · 중금 · 소금), 박판(拍板)과 함께 대고가 편성되어, 가무의 주1를 나타내는 타악기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대고 형태는 알 수 없다. 고려 때에는 예종 9년(1114년)에 송에서 보내온 대성신악(大晟新樂)의 편성 악기 목록에 대고가 보이고, 『 고려사』 「예지」의 ‘의봉문에서 사서를 선포하는 주2에 ‘구정의 동서에 각각 대고 15개를 배치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궁중음악 및 군례에 대고가 편성된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 경국대전』 주3, 『 세종실록』 주4, 『 악학궤범』[^5]에 대고의 용도와 형태가 제시되어 있다. 세종은 당시 아악 연주에 사용되고 있던 대고가 송의 제도와 같으니 진고로 대체해도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낸 적이 주6 이와 함께 세종 때 창제된 주7의 무구(舞具)로 대고가 편성되었다가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후에는 생략되었다는 내용이 『 종묘의궤』에서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중기 이후로는 궁중 음악 연주에서 대고의 사용이 지속되지 않은 듯하다. 이에 비해 군례에서 대고는 군기의 하나로 상비되었고 그 쓰임도 체계화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주8에 보이는 화룡대고(畵龍大鼓)와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의 주9 유형이 군례에 편성된 대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는 군기로서의 대고는 전승이 단절되었고, 북통에 용무늬를 그려 넣은 용고(龍鼓)가 대취타 편성에 포함되었다.
한편, 농악에서의 대고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1982년에 간행된 민속조사보고서에 현장어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 「오례」, 『악학궤범』에 보이는 대고는 나무로 북통을 만들고, 북통 가장자리에 못을 박아 소가죽을 씌운다. 북통은 주10로 싼 후에 붉은 색을 칠하고 모란을 그려 넣으며, 고리를 박고 홍색 명주실 끈을 달아 완성한다. 가죽을 씌울 때 사용한 주11)과 고리는 모두 도금하되 제향용은 도금하지 않는다고 적혀있다. 조선후기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 그려진 화용고는 북통에 붉은 칠을 하고 용무늬를 그려 넣은 것인데 주칠고(朱漆鼓)라고도 한다.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대고는 북통 너비 73.5cm, 지름 80cm의 북으로, 북통에 용무늬가 그려져 있다. 북통에 용무늬를 그려 넣은 용고보다 북통이 주12 농악에 사용되는 대고의 형태는 일반적인 농악 북과 같다.
궁중에서 사용된 대고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궁중악무에 편성되었고, 정대업지무의 무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군기의 하나로 고려때부터 조선후기까지 군례에 수반되어 신호와 주13을 담당하였다. 군례 중의 하나인 ‘ 대사례’에서는 임금이 활을 쏠 때 적중하면 대고를 울렸다. 군례에 따르던 주악의 편성이 축소되면서 20세기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농악에서의 대고는 일반적인 북의 사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궁중 및 군례에서의 대고 연주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 배치된 대고는 북틀에 얹어 놓고, 북채를 쥐고 위에서 아래로 연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악에서의 대고 주법은 일반 농악북의 주법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