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혼은 혼인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신랑이 신부집에 일정액의 신부값을 치러야 하는 관습을 가진 사회에서 만약 그러한 신부값을 치를 능력이 없을 때 그 대신에 노력봉사를 해주고 나서 신부를 데려오는 경우와, 신랑의 인격 및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일정기간 신랑이 신부집에 노력봉사를 해주기를 요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풍습은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를 봉사혼으로 간주하거나 극히 최근까지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던 남귀여가(男歸女家) 또는 서류부가(壻留婦家)의 습속은 바로 이의 유제(遺制)라는 해석들이 있다.
서옥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 三國志≫ 위서 동이전에 나온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우선 말로 혼인을 정한 뒤 여자의 집 뒤에 작은 집을 지어 서옥(壻屋)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 집 문밖에서 자기 이름을 알리면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 여자와 동숙할 것을 세 번 청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를 허락하며, 남자는 다음날 떠날 때 전백(錢帛)을 놓고 간다.
그 뒤 여자가 자식을 낳고 장성하면 비로소 남자의 집으로 간다. 손진태(孫晉泰)는 이러한 서옥제를 일종의 봉사혼으로 보고 있다.
즉, 사위가 처가에 기류봉사(寄留奉仕)하고, 낳은 아이가 상당히 장성한 뒤에 아내와 자식과 함께 자기집으로 돌아와 독립생활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봉사혼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이러한 관습은 최근까지 몇몇 지역에서 혼례식을 신부의 집에서 거행하는 것과, 신혼 초에 며칠 동안 처가에 머물거나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서 처가에 내왕하는 형식으로 남아 있다고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우리 나라의 여러 지방에서 나타나는 데릴사위제도를 고구려의 봉사혼제의 유습(遺習)일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평안남도 성천군일대의 산골 화전민과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는 1900년경까지만 하여도 데릴사위제가 성행하여, 한 집에 비록 아들이 있어도 딸을 위하여 대부분 데릴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사위는 짧게는 5∼6년, 길게는 10여년 동안 처가의 한 구성원으로 노력을 봉사하면서 같이 살고, 수명의 자녀를 낳은 뒤에 처가의 사정이 허락하면 분가하여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사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딸이 열 살 전후해서 17, 18세의 사위를 맞아들이게 되고, 딸이 성인이 되면 비로소 혼인을 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을 예로 들어, 손진태는 그것이 고구려 봉사혼의 유풍일 것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첫아이는 반드시 본가에 가서 낳는다.’는 것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풍습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아키바(秋葉隆)도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관습인 우귀(于歸)의 관습을 들어 봉사혼의 유제로 간주하였다. 즉, 혼례가 신부의 집에서 일단 거행되고 나서 신랑은 신부집을 수시로 내왕하다가 1년 내지 3년 안에 길일을 택하여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기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우귀의 관습에서 신랑이 신부집에 체류하는 동안 노력봉사를 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봉사혼의 흔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아키바와 손진태는 모두 이 관습이 신랑에 의한 신부집에의 노력봉사라는 점에서 이것은 모계가족제도와 연결시켰고, 김두헌(金斗憲)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광규(李光奎)는 고구려의 서옥제에서는 신랑이 밤에만 와서 동숙하는 것이지 신부집에 노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제도는 혼인 후의 거주율(居住律)상의 모처·부처제(母處父處制) 즉, 일단 신부집에 가서 얼마 동안 살다가 신랑집으로 완전히 옮겨오는 풍습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어떻든 고구려의 서옥제를 봉사혼으로 볼 것인지, 서류부가의 풍습이 봉사혼의 유제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이 모계사회의 유제라는 견해는 현대에 와서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