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금강 하류 지역의 전라도 함열과 용안 일대에는 1390년 이래 득성창(得成倉, 13901428년, 14871512년)과 덕성창(德成倉 혹은 德城倉, 1428~1487년) 등의 조창이 설치되어, 전주와 금강을 끼고 있는 전라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512년(중종 7)에는 득성창이 폐쇄되고 옥구 군산포에 신설된 군산창(群山倉)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런데 19세기에 편찬된 자료인 『만기요람』과 『대전회통』에는 당시 덕성창(득성창)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당창으로 바뀐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12년 득성창의 폐쇄 이후 어느 시점에 이 지역에 성당창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남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성당창의 최초 설치 시기는 1656(효종 7)1661년(현종 2)으로 추정되고 있다. 17세기 중엽 전라도 부안에서 살았던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인조 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산에 나암창(羅巖倉)이 군산창의 기능을 분담하다가,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나암창의 기능을 대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점을 볼때 17세기 중엽 성당창이 설치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설치 당시 성당창에는 14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90년(정조 14) 주교당상 정민시의 건의에 따라 적재량을 800석에서 1,000석으로 늘리면서 성당창의 조운선은 2척이 줄어든 12척이 되었다. 조선 후기 조운선에는 사공 1명과 조군 15명 등 16명이 승선하기 때문에 성당창에는 총 192명의 사공과 조군이 배치되었다. 성당창은 함열, 고산, 진산, 익산, 금산, 용담, 남원, 운봉 등 전라도 8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8곳의 고을은 성당창과 가까이 있거나 전라도 동부 내륙에 위치한 곳들이었다. 과거 득성창은 20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는 곳이었지만, 1512년 금강 하구에 군산창이 설치되었던 까닭에 조선 후기 성당창으로 전세를 납부하는 고을의 숫자는 과거 득성창이 있었을 때보다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의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의 창고 시설이 그려져 있다.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에 3채의 창고와 1채의 사창(社倉)이 표시되어 있다. 창고와 사창은 모두 세곡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그 외 성당창에 봉세청(捧稅廳)과 순풍당(順風堂), 사공청(沙工廳) 등 3채의 건물이 확인된다. 성당창의 집무소에 해당하는 성당 봉세청은 세곡을 수납하고 적재하는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순풍당은 조운선의 항해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녕을 기원하는 당집이었으며, 사공청은 조운선을 운항하는 선원들의 항해 준비 장소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성당창에는 창마당, 줄바탕 등의 지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마당은 창고에서 선박으로 세곡을 옮길 때에 임시로 세곡을 놓아두던 곳이었으며, 줄바탕은 선박에서 사용하기 위한 밧줄을 꼬던 장소였다고 한다. 그 외 선박의 입출입을 용이하게 하는 포구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당창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서포, 군산진 등을 거쳐 금강 하구를 빠져나가 오식도에 이른 후 원산도와 안흥량, 강화, 통진 등을 거쳐 한강에 이른 후 강을 따라 올라가 광흥창에 도착했다. 운항 기간은 약 1개월, 운항 거리는 금강 구간은 알 수 없으나 군산진으로부터 서울 용산까지의 거리는 약 940리였다. 조운선이 연해를 운항할 때는 먼저 해로를 익히 아는 자로 하여금 뱃길이 우려되는 곳에서 항해를 지휘케 하도록 법규화되어 있었다.
또한, 조운선은 수군진의 첨사나 만호가 호송하도록 하였으며, 담당 구간의 호송이 끝난 후에는 문서를 발급하여 증명하게 하였다. 연해읍에서 조운선을 호송할 때는 각 해변 고을의 앞 바다에 있는 암초의 위아래와 안팎에 표지목을 세우고, 수로를 잘 아는 사람을 매 선당 2, 3인씩 승선시켜 수로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교대할 때는 문서를 주어 이를 증명토록 하였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명확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과경장(過境狀)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는 각 선박의 호칭, 사공 이름을 모두 쓰고, 관인을 찍었다. 조운선의 호송은 호송리(護送吏)라고 불리는 고을의 아전들이 담당하였으며, 호송관(護送官)이라 불리는 수영의 첨사들이 총괄적인 책임을 졌다.
한편 조운선의 주요 동력은 조군들의 노동력인 노가 아니라 돛이었다. 조운선에는 15명의 조군이 승선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항상 노를 저었던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조수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돛을 활용하면서 항해하였다. 조군이 노를 저은 것은 어장의 그물 사이를 통과하거나, 바람이 약해 빨리 항해할 수 없을 때 등으로 한정되었다. 성당창을 출발한 조운선이 군산 앞바다에 도착하면 남동풍을 타고 북서쪽으로 향해 가다가 안흥량을 지나서는 다시 남서풍을 타고 북동쪽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바람이 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운항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운선에 승선하는 사람들은 장기간 바다에서 생활하며 항해를 해야 했다. 항해에는 항상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에 조군을 비롯한 선원은 무사 항해를 기도하기 위한 제사를 지냈다. 19세기 중엽의 조운선 항해 기록인 『조행일록(漕行日錄)』에 따르면 성당창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총 3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다. 순풍제(順風祭), 용당제(龍堂祭), 해약제(海若祭) 등이 그것이다. 순풍제는 조운선이 출발하기 전 성당창 인근에 설치되어 있었던 순풍당에서 함열현감의 주관 아래 지냈다. 순풍제가 끝나면 세곡을 실은 조운선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포를 쏘며 출발하였다. 그리고 서천 용당에 이르러 다시 용당제를 지냈다. 용당제는 사공이나 감관을 시켜 지냈다. 용당제를 마치고 금강 하구를 빠져나온 조운선은 바다에 이르러 해약제를 지냈다. 해약제는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바다의 신인 해약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해약제는 영운감관(嶺運監官)이 제관이 되어 거행하는데, 제관은 돼지고기와 함께 홑저고리를 바다에 빠뜨리는 의례를 행하였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에는 성당창이 함열 관아 북쪽 20리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당창은 전라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성당창이 있던 성당 포구는 금강의 지류인 중신천을 사이에 두고 1487년(성종 18)부터 1512년(중종 7) 사이에 득성창이 있었던 익산시 용안면 난포리와 마주보는 입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 입지의 관점에서도 성당창은 득성창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라도 지역의 조창에서 세곡 운송을 관장하는 직책은 원래 해운판관(海運判官)의 역할이었지만, 해운판관은 1697년(숙종 23)에 혁파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사(都事)가 그 임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성당창의 전세 수납은 군산포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다가, 1791년(정조 15)부터는 함열현감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성당창 소속의 조운선은 원래 800석의 세곡을 싣고 경창으로의 운송을 담당하였으나, 1790년(정조 14)부터는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 1895년(고종 32) 조운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성당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고려시대 이래 금강 수계에 설치된 조창은 전라도 전주 권역 및 동부 내륙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 금강 수계에 운영되었던 조창인 성당창은 조선 전기에 운영되었던 득성창과 덕성창의 기능을 계승한 조창이었다. 그러나 1512년 금강 하구에 군산창이 신설되었던 까닭에, 성당창의 수세 구역은 과거 득성창이나 덕성창의 수세 구역보다 많이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창은 19세기 말까지 주변 지역 및 전라도 동부 내륙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