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은 불법을 듣고 스스로의 해탈을 위하여 출가한 수행자이다. 성문은 사제(四諦)의 진리를 깨닫고 몸과 마음이 멸진(滅盡)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간 성문은 아공(我空)의 이치만을 깨달았을 뿐, 법공(法空)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대승에서는 아(我)가 법(法)의 일부요 아와 법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혼자만의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대승불교권에서는 성문을 기피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범어로는 śrāvaka, 빠알리어는 sāvaka이다. 연각(緣覺) · 보살(菩薩)과 함께 삼승(三乘)이라고 한다. 원래의 의미는 석가모니 당시의 제자들을 말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중생의 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보살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각됨에 따라, 성문은 소승(小乘)에 속하게 되었다.
이 성문은 사제(四諦)의 진리를 깨닫고 몸과 마음이 멸진(滅盡)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성문은 아공(我空)의 이치만을 깨달을 뿐, 법공(法空)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즉, 일반적으로 중생이 참다운 나라고 주장하는 실아(實我)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기본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 뿐 영원불변의 참된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我空]은 깨닫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 모여서 생겨났으므로 절대의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은[法空]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성문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여열반을 증득하기는 하지만, 그 아(我)가 법(法)의 일부요 아와 법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혼자만의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성문에 대한 분류는 2종 · 4종 · 5종 성문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신라 정토학(淨土學) 연구에서는 2종 성문에 대한 논란이 많았고, 천태종(天台宗) 계통에서는 4종 성문의 분류를 따랐다.
2종 성문은 정성(定性)과 부정성(不定性)으로 나누어진다. 정성 성문은 완전히 성문의 길에 고착된 자이며, 부정성 성문은 아직은 보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성문이다.
신라의 정토학자들 중에서 원효는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주장과는 달리 2종 성문이 모두 정토에 왕생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으나, 현일(玄一)과 경흥(憬興)은 임종 전에 보살심을 일으킨 부정성 성문은 왕생할 수 있지만, 정성 성문은 왕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정성 성문도 무여열반에 든 뒤에, 다시 발심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서도 일승(一乘)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4종 성문은 ① 처음부터 끝까지 소승과 관계를 같이하는 결정성문(決定聲聞), ② 아공에 집착하고 그 경지에 만족하여 교만심을 일으키는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③ 대승에 뜻을 두었으나 성문의 공부를 닦다가 다시 대승으로 돌아오는 퇴보리심성문(退菩提心聲聞), ④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성문의 모습을 취한 응화성문(應化聲聞) 등으로 나누어진다.
천태종의 이와 같은 분류는 소승의 길에서 대승보살의 길로 인도하려는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성문으로서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수다원은 역류(逆流)로 번역되며,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번뇌가 없는 행을 닦아 거칠고 무거운 번뇌가 생기지 않게 된 이로서, 내세에 지옥 · 축생 · 아수라 등의 몸을 받지 않게 된다고 한다.
사다함은 일왕래(一往來)로 번역되며, 욕망을 모두 버리고 번뇌를 끊었으므로 죽은 뒤 천상(天上)에 태어났다가 다시 인간으로 온 뒤 천상에 태어나는 1왕복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해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및 우리 나라의 선사들은 이것을 망상과 관련시켜서, 앞의 생각이 그릇된 것을 일으켰다면 뒤의 생각에서 곧 멈추고, 앞의 생각에 집착이 있었다면 뒤의 생각에서 이를 멈출 수 있는 수행의 경지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아나함은 불환(不還) 또는 출욕(出欲)으로 번역된다. 즉, 욕심을 벗어나서 다시는 욕심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뜻한다. 아라한은 무쟁(無諍)으로 번역된다.
끊어야 할 번뇌가 없고 떠나야 할 탐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없으며, 정(情)에 대한 위순(違順)과 주객(主客)에 대한 분별이 없어서 항상 고요한 해탈의 경지에 있는 성자를 뜻한다.
성문사과의 입장에서 보면 성문은 매우 깊은 수행을 하여야 하며, 아라한의 경지는 대승의 해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단지 자기만의 해탈이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승불교권에서는 이 성문을 무조건 기피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선가귀감』에서, “성문은 고요한 데 머무는 것으로써 수행을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니 귀신이 보게 된다. 그러나 보살은 성품이 본래 빈 것임을 깨달아 그 마음이 스스로 고요하므로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으니 외도와 마군(魔軍)들이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별은 올바른 보살과 성문의 대비라고 볼 수 없다.
모두가 불제자이지만 보살은 중생을 위한 실천이 있고, 성문은 자기의 해탈에 치중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