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송시열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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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괴산 송시열 유적 중 송시열 묘 정측면
괴산 송시열 유적 중 송시열 묘 정측면
조선시대사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유 송시열의 신도비. 묘소.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괴산 송시열 유적(槐山 宋時烈 遺蹟)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99년 12월 29일 지정)
소재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외 (화양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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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유 송시열의 신도비. 묘소.
내용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12월 29일 지정 해제되고 사적 괴산송시열유적에 통합되었다.

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5년(인조 13) 효종(당시 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된 이후 사헌부장령 ·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효종 때는 북벌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서인 ·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 3)에 어제(御製)로 세웠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50㎝로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다. 묘소는 신도비각으로부터 위로 300m지점의 산 중턱에 있는데, 본래는 수원(水原)에 있던 것을 1757년(영조 33)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묘역은 약 300평으로 상석 · 문인 · 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1736년(영조 12)에 세웠으며 다른 하나는 1804년(순조 4)에 세웠다. 1979년 묘소 진입로에 계단을 설치하는 등 보수 · 정화작업을 실시하였다. 한편 신도비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하는 속설(俗說)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인물지』(충청북도, 1987)
『문화재지』(충청북도, 1982)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전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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