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12월 29일 지정 해제되고 사적 괴산송시열유적에 통합되었다.
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5년(인조 13) 효종(당시 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된 이후 사헌부장령 ·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효종 때는 북벌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서인 ·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 3)에 어제(御製)로 세웠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50㎝로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다. 묘소는 신도비각으로부터 위로 300m지점의 산 중턱에 있는데, 본래는 수원(水原)에 있던 것을 1757년(영조 33)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묘역은 약 300평으로 상석 · 문인 · 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1736년(영조 12)에 세웠으며 다른 하나는 1804년(순조 4)에 세웠다. 1979년 묘소 진입로에 계단을 설치하는 등 보수 · 정화작업을 실시하였다. 한편 신도비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하는 속설(俗說)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