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란창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룡연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창(漕倉).
정의
고려시대에 현 북한 황해남도 룡연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창(漕倉).
개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稅穀)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안란창(安瀾倉)은 고려시대 서해도(西海道) 풍주(豊州)와 옹진(瓮津),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던 조창이었다.

내용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에 안란창은 포함되지 않았다. 고려 정종(靖宗) 연간(1034~1046)에 전국 각 조창의 조운선 숫자를 정할 때에도 안란창을 제외한 12조창만 언급되고 있어 당시까지도 안란창은 조창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안란창이 기록 상 처음 확인되는 시기는 1067년(문종 21)이므로, 안란창의 설치 시기는 문종 즉위 이후 문종 21년 사이인 1046년~1067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문종 연간부터 고려 13조창이 완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란창은 서해도 장연현(長淵縣)에 위치해 있었다. 장연현은 옹진현의 속현(屬縣)이었으며, 현재 옹진반도 지역에 위치하였다. 992년(성종 11)에는 전국 각 지역의 60개 포구로부터 개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운송비, 즉 수경가(輸京價)를 정하였는데, 60포구 중 장연현에는 해위포(海葦浦)가 있었다. 해위포의 이전 호칭은 위포(葦浦)인데, 해위포에서 개경까지의 수경가는 세곡 8석당 1석이었다. 안란창은 이 해위포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란창의 현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기존 연구들은 크게 옹진반도 남쪽의 대동만 일대와 옹진반도 북쪽의 남대천 하구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러나 남대천 하구에서 개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해난 사고의 위험이 높은 장산곶 앞바다를 지나야 한다. 때문에 옹진반도 북쪽의 남대천 하구보다는 남쪽의 대동만 일대에 안란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대동만 일대에서 고려시대 바닷가 조창의 일반적인 입지조건에 맞는 곳을 찾는다면, 한천이 대동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현 황해남도 룡연군 남창리 지역으로 안란창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다.

안란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고려시대 서해도 풍주와 옹진, 그리고 그 속군현(屬郡縣) 지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안란창에 모인 세곡은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안란창을 비롯한 13조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조창을 드나드는 세곡의 보관 및 운송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며, 13조창에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다. 인종 때(1122~1146년)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변천과 현황

안란창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서해도 해안 지대가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시에 안란창이 폐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란창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조선시대 황해도에는 예성강 수계(水系)에만 조창이 설치되었고, 안란창이 있던 지역에는 조창이 운영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안란창은 고려시대 전국에 설치된 13조창 중 하나로서, 서해도 지역에 위치했던 유일한 조창이다. 서해도 서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안란창이 위치했던 황해도(고려시대 서해도) 서해안 일대에 별도의 조창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 대신 황해도 서해안 지역의 세곡은 예성강 하구에 있었던 조창인 금곡포창(金谷浦倉)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문경호, 혜안, 2014)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한정훈, 혜안, 2013)
『한국사: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14(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3)
「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정요근,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집필자
정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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