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95㎝, 어깨 너비 54㎝.
불상은 원래 안동시 미질동의 이재용가(李在用家)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안정사로 옮겼다. 다시 안동 댐 조성에 의해 1973년 지금의 소장처인 봉정사(鳳停寺)로 이장하여 극락전에 별도로 안치되어 있다.
안정사에 있을 당시 개금을 하여 원래의 화강암 석질이 주는 중후한 맛은 느낄 수 없다. 특히 얼굴과 손 부분은 개금마저 일부 박락되어 있어 종교상으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상대석을 제외한 연화대좌와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상실되어 있다. 그러나 불신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의 수인(手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이 주는 전체적인 비례감은 비교적 안정된 느낌이다. 특히 우람한 어깨와 양 무릎이 주는 무게감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불상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개금(改金)과 가채(加彩)로 인하여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의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이마의 폭이 넓고 턱이 약간 좁으며 턱에는 가는 선으로 음각하여 이중 턱을 표현하고 있다.
목은 어깨를 움츠린 듯이 매우 짧게 조각되어 있다. 개금이 두껍게 되어 있어 삼도(三道)의 표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착의는 통견의(通肩衣 : 어깨에 걸쳐진 옷)로 가슴에는 내의와 승각기[上內衣]가 표현되어 있다. 개금 뒤로 보이는 옷주름의 선은 매우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처리되어 있다.
비록 불상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으나 전체적인 비례감이나 안정감 및 옷주름의 유려한 처리 방식 그리고 항마촉지인의 수인 등에서 당시 불상 양식의 중심인 경주 지방에서 조성되었던 통일신라시대 불상들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이 수도인 경주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 수준이 상당히 높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양 지역간의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조각 수준이나 양식 및 도상적인 측면에서 이 불상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