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선공감정 엄서(嚴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 엄인달(嚴仁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엄황(嚴愰)이다. 어머니는 응교(應敎) 이길(李洁)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權知)에 보직되고, 예절이 밝아 인조의 사랑을 받았다. 정언(正言)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설서(說書)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지평(持平)이 되고 1638년 충청도염문사(忠淸道廉問使)를 거쳐, 수찬·평안도도사에 이어 다시 수찬(修撰)·의성현령·부교리(副校理)·지평·교리·헌납(獻納) 등을 역임한 뒤 1647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응교(應敎)를 거쳐, 집의(執義)로 있을 때 붕당조성을 비호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었다. 1651년(효종 2) 좌승지로 재직 중에 김자점(金自點)이 처형되고 그 일당이 제거될 때, 평소 김자점과 안면이 있다 하여 극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좌의정 한흥일(韓興一)이 과거 전랑(銓郎)으로 있을 때, 김자점 일당의 천거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구명을 호소하여 면천에 중도부처(中道付處: 유배지로 가도 도중에 정상을 참작하여 일정한 장소에 머물게 하던 죄형)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뒤 등용되어 태복시정(太僕寺正)·홍문관교리를 거쳐, 승지에 오르고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