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한인사회 ( )

연변 한인 소학교
연변 한인 소학교
사회구조
개념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이루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사회.
정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이루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사회.
개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내의 동부에 위치하며 대략 동경 127∼131°, 북위 42∼44°사이에 걸쳐 있다. 동쪽으로는 소련의 연해주(沿海州)와 인접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닿아 있다. 또한 서쪽은 길림성의 통화지구(通化地區)와 접하여 있다. 동서의 길이는 약 306㎞이고, 총 면적은 4만 2,700㎢로 길림성 면적의 23.7%를 차지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6시 2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6개 시는 연길시(延吉市) · 도문시(圖們市) · 용정시(龍井市) · 돈화시(敦化市) · 화룡시(和龍市) · 훈춘시(渾春市) 등이고, 2개 현은 왕청현(汪淸縣)과 안도현(安圖縣)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구는 1990년 현재 207만 9,902명이고, 그 중 자치권을 행사하는 조선족, 말하자면 한국인은 82만 1,479명으로 전체의 42.7%에 해당하고, 중국족은 118만 7,262명으로 52.2%이며, 기타 민족은 7만 1,161명으로 전체 인구의 3.4%를 점유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기타 민족은 조선족과 한족(漢族)을 제외한 민족으로 만주족(滿洲族), 회족(回族), 몽고족(蒙古族), 장족(裝族), 시버족, 묘족, 이족, 위글족 등 16개 민족을 포함한다.

각 민족의 분포상태는 지역에 따라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이는데, 조선족의 대부분은 벼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하곡평원지구에 거주한다.

인구밀집지대는 연길 · 도문 · 용정 · 화룡 · 훈춘의 5개 시 지역으로 연변 전체주민의 절반 이상이 이들 지역에 산다. 반면 한족의 대부분은 밭농사를 주로 하여 구릉지대에, 만족은 훈춘시에 집중되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될 당시 인구조사에 의하면 1953년 조선족이 절반에 가까운 49.7%를 차지하였다. 그 후 조선족의 인구는 계속 감소하여 1982년에는 42.8%에 달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에 조선족의 인구증가율이 둔화되는 한편 자치주 외부로 이주하는 인구가 증가되었기 때문이며, 한편 중국인의 연변으로의 유입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자치주에 속한 연변은 북간도(北間島)로 알려진 곳이다. 원래 두만강 대안인 북간도는 청(淸)나라 태조(太祖)가 일으킨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사람들의 입주를 금한 곳이다. 이것을 ‘봉금령(封禁令)’이라 한다.

봉금령이 해제된 것은 1870년경 러시아군이 동부로부터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면서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서침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내에서 중국인의 이주와 두만강 대안에 있던 조선족의 유입을 장려한 것이다.

봉금령이 해제될 무렵, 1869년 한국에는 ‘기사기아(己巳飢餓)’가 일어나 한인들이 대거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정주하였다. 이 때부터 이 지역을 북간도라 하였다. 간도란 강에 둘러싸여 있다는 의미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두만강 대안(對岸)을 북간도, 압록강 대안을 서간도라 하기도 한다.

청나라는 1881년 초간국(招墾局)을 설치하여 한국으로부터 사람들의 유입을 통제하였고, 1885년에는 화룡욕(和龍峪)에 통상국(通商局), 그리고 광제욕(光霽峪)과 서섭강(西涉江)에 통상분국(通商分局)을 설치하였고, 북간도 남부를 조선족개간구역(朝鮮族開墾區域)으로 정하였다.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연변은 길림성 동남로관찰서(東南路觀察薯)에 속하였고, 이 관찰서 내에 연길 · 화룡 · 훈춘 · 왕청 · 돈화 · 액목(額穆) · 영안(寧安) · 동녕(東寧) 등 8개 현이 있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하자 러시아군 17만 명이 북간도로 진격하여 훈춘 · 돈화 등지를 점령하고 방화살인 강간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중국은 정변군(靖辺軍)을 파견하고 지방민으로 조직된 항로대(抗露隊)와 협력하여 연길 · 훈춘 · 안도 · 동녕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러시아군은 1901년 체결한 신축조약(辛丑條約)으로 북간도에서 철수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간도의 한인(韓人)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연길에 통감부간도파출소(統監府間島派出所)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북간도에 있는 한인의 활동을 감시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은 국자가(局子街)에 길림변무공서(吉林辺務公署)를 설치하였다. 1909년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하는 도문강중한계무조약(圖們江中韓界務條約)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을 일명 ‘간도조약(間島條約)’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북간도 한인에 대한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을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간도 한인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일본은 한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간민회(墾民會)와 농무회(農務會) 등을 조직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연변지역에서는 3월 13일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연길 대랍자(大拉子) 등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나자 연변에서는 국자가(局子街)와 왕청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1920년 항일독립운동의 최고봉인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그리고 훈춘사건(渾春事件)이 발생한 곳이 모두 연변에 속한 곳이다.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고 간도는 한인 밀집지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하나의 성이 되어 간도성(間島省)이라 하였다. 만주국 성립 초기 공산당이 주도하는 춘황투쟁(春荒鬪爭)이 있었고, 이에 대한 일본의 보복으로 해란강대학살사건(海蘭江大虐殺事件)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도 만주국 치하에서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고 징용 · 징병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만주국은 와해되고,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이 대결하는 해방전쟁(解放戰爭)을 강행하였다. 국민당은 연변에 중국국민당길림성연길변사처(中國國民黨吉林省延吉辯事處)를 설립하고 공산당은 연변에 연변행정독찰전원공사(延辺行政督察專員公署)를 설립하였다.

한편 해방직후 연변에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가 수립되고 중립노선을 취하다가 10월 공산당 계열의 중공연변위원회(中共延辺委員會)가 간도임시정부를 접수하였다. 이 위원회는 연길 · 훈춘 · 화룡 · 왕청 그리고 안도의 5개 현을 관할하였고, 간도시를 연길시라 하여 행정의 중심지로 하였다.

6·25전쟁이 중반을 넘어선 1952년 2월 중앙에서 ‘소수민족지구 자치에 관한 정령’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8월 29일 ‘연길각족각계 제1기인민대표대회(延吉各族各界第一期人民代表大會)’가 개최되었다. 이 곳의 대표들은 연변전원공서를 폐기하고 연변조선자치구인민정부(延辺朝鮮自治區人民政府)의 발족을 선언하였다.

1952년 9월 3일 연길에 대표자가 모여 연변조선민족자치구(延辺朝鮮民族自治區)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1954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자치구로 바꾸고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 1955년 4월 이를 승인한다. 이에 따라 1955년 12월 연길에 모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회의가 자치주를 선포하고 주장(州長)에 주덕해(朱德海)를 선출하였다.

1958년 9월에는 인민공사집체호제(人民公社集體戶制)가 실시되어 전 농민은 각 지역별로 분사(分社)조직에 편입되고 진(鎭) · 향(鄕) · 촌(村: 대대) · 자연둔(중대) 단위제 집단영농제 속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같은 해 1월 길림성위원회에 속했던 돈화현이 연변자치주에 귀속되었다. 1991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한 2개 시와 6개 현이 6개 시와 2개 현으로 행정상 개편되었다.

민족자치권과 언어생활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행정상 길림성에 속한 하나의 주이지만 자치주기 때문에 일반 주가 갖추고 있는 것보다 많은 공공기관을 갖고 있다. 자치주의 중요한 기관이 자치주인민대표회와 자치주인민정부이다. 인민대표회의는 의회에 해당하는 기구로 상무위원회가 있고 주임이 이를 대표한다.

인민정부는 집행부로 주장이 이를 대표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의 자치주이기 때문에 주임과 주장은 한인들이다. 자치주 인민대표대회의 대의원은 주민의 일반적 선거를 통하여 각 현 대표회의에서 선출한다.

1952년 연변의 한인 수는 자치주 총인구의 74%였고, 한인간부는 총간부 수의 78%를 차지하였다. 1962년에 오면 한인 수는 50.04%로, 한인간부 수는 64%로 떨어진다. 그렇더라도 이렇듯 민족자치권이 급속히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교육과 기나긴 항일운동으로 단련된 저력, 그리고 광복 후 많은 간부학교를 세운 결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57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동안 연변의 한인들은 우파(右派:자본주의) 또는 지방민족주의로 몰려 많은 고난을 겪었다.

특히 문화혁명으로 연변의 사정이 가장 어려웠던 1971년에는 많은 한인간부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한인간부의 비율이 크게 줄었다. 사인방(四人幇)이 분쇄된 뒤 이러한 사정은 점차 개선되어 1980년 한인간부의 총수는 연변간부총수의 60%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치주에 중요한 것이 자치주의 민족언어이다. 연변이 중국의 자치주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국어로 하지만 연변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연변의 한인들은 1953년부터 종래 한자(漢字)를 섞어 쓰던 것을 취소하고 공공단체들의 간판에서부터 조그만 상표에 이르기까지 한글과 중국어의 두 문자로 표시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한글을 반드시 위에 쓰거나 오른쪽에 쓰게 하여 자치주내의 제1종문자로서 한글의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문화혁명기간에 민족교육이 가장 심하게 파괴당했기에 민족교육의 정상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95.2%의 한인소학생과 중등학생의 82.4%가 한글로 교육을 받고 있다.

또 대학과 전문학교의 입학시험에 한인학생들이 한글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됨으로써 입학률이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한글교육과 함께 중국어교육도 중시되고 있으며, 오늘날 개방의 물결 속에서 제1외국어로 영어학습에 대한 열의도 대단하다.

교육 · 학술

연변은 재중(在中)동포의 교육 중심지이다. 동북 3성의 산재지구의 모든 조선족학교들은 연길에서 출판하는 교재를 사용한다. 특히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우국지사들은 초기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이 결과 한편으로는 일본군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유격전을 벌이고 한편으로 학교를 세워 젊은 세대에게 민족혼을 심고 길렀다. 그리하여 재중한인들은 교육을 높이는 전통을 갖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국지사들이 건립한 학교로 유명한 것이 서전의숙(瑞甸義塾), 창동학교(昌東學校), 광성학교(光成學校), 명동학교(明東學校), 정동학교(正東學校), 길신여학교(吉新女學校), 봉명학교(鳳明學校) 등이다. 연변에 있는 학교는 크게 4개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소학교와 중학교를 포함하는 기초교육기관이다. 연변에는 1,073개의 소학교와 보통중학 211개 교가 있다. 두 번째 부류의 교육기관은 고등교육기관이다. 이에는 연변대학을 비롯하여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전문 그리고 연길예술학원분원이 포함된다.

연변대학은 중국 각지에 산재한 한인들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멀리서 이 곳으로 유학을 온다. 연변대학 못지않게 오랜 역사를 갖고 유명한 학교가 연변의학원이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곳이 중점전업학교들이다. 이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학교로 연변재무학교, 연변예술학교, 연변인민경찰학교, 연변임업학교 등 9개 교가 포함된다. 네번째 부류는 전문학교이면서 수학 연한이 낮은 전문교로 이에는 농직업중학교, 기공학교, 농맹아학교 등 중학 수준의 전문교가 포함된다.

이러한 정규학교 이외에 연변에는 근로자 과외학교가 있다. 근로자 과외학교로도 소학교가 1,112개 학교, 중학교가 277개 학교, 중등기술학교가 525개 학교, 대학이 5개 학교가 있는데, 대부분의 학생은 한인들이다.

문화혁명의 10년간에 걸친 지식인 말살책으로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다름없이 연변지역의 교육계가 입은 피해도 커서 근로자 과외학교는 물론 연변의 3개 대학이 모두 폐쇄되었다. 연변의학원과 연변농학원은 전문학교로 격하되고 연변대학의 대다수 교수와 강사들이 농촌으로 밀려나 노동개조에 희생되었다.

그 뒤 사인방이 몰락함에 따라 모든 학교는 점차 회복되었으나 문화혁명기간 중 많은 지식인을 잃었다. 오늘날 중국 속의 한인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뛰어난 민족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과학기술사업은 농업기술의 시험 및 보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58년 연변과학기술협회 산하에 농업 · 수리 · 임학 · 화학 · 지질지리 등 14개 학회가 세워졌다.

문화혁명기간에 일시 해체되었던 협회는 다시 회복되어 오늘날 28개 학회로 늘어났다. 현재 전체 자치주의 과학기술 종업원 가운데 한인이 65.4%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과학분야에서도 1957년 12월 연변한글연구회가 설립되고, 그것이 1964년 역사언어연구소로 확대되었는데, 이 연구소에 역사 및 언어의 두 연구실이 있다.

1981년 한인교육역사연구소와 연변사회과학학회연합회가 설립되어 철학 · 정치학 · 경제학 등 15개 학회를 거느리고, 그 밖에 조선역사연구회 · 일본철학연구회 · 조선문학연구회 · 한글학회 등이 각종 연구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교육기관 못지않게 연변에는 많은 연구소가 있다. 연변사회과학원 내에 조선어문연구소 · 민족교육연구소 · 문학연술연구소가 있다. 사회과학원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연구소로 연변역사연구소 · 연변언어연구소 · 연변교육연구소 그리고 연변문학예술연구소가 있다.

자연과학분야에도 8개의 연구소가 있는데, 농업과학연구소 · 잠업연구소 · 임업연구소 · 축산연구소 · 농업기계연구소 · 수도유실방지시험소 · 수리관개시험소 그리고 수전시험장 등이 있다.

이들 인문사회과학계열과 자연과학계열 연구소에 종사하는 전문인은 2만 4,000여 명에 달한다. 이들 중 20%는 연변대학 · 연변의료원 · 연변농학원 등의 교수를 겸하고 있다.

연구소와는 별도로 연변에는 여러 연구회가 있다. 인문사회계열의 학회는 연변사회과학연합회, 중국조선역사연구회, 중화중국일본철학연구회, 중국조선문학연구회, 중국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연변사회과학연합회는 산하에 15개의 학회가 포함되어 있으며 800여 명의 회원이 있고, 『문학개론』 · 『언어학개론』 등의 학술지를 발간한다.

자연과학분야는 연변과학기술협회가 있다. 이 곳에는 83개에 달하는 자연과학계열의 학회가 포함되 있으며, 5,000여 명의 회원이 있으며 『대중과학』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이들 연구소와 연구회의 활동은 요즈음 더욱 활발해지고 있으며 특히 남한과의 관계가 개방되면서 남한의 학회들과 공동연구와 공동발표회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문화 · 예술

사회주의 국가에서 장려하는 영역의 하나가 예술분야이다. 연변에는 인문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계열에 상응하는 예술계열에 연변문예연구회가 있다. 900여 명의 회원을 갖는 연변문예연구회는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발행한다. 연변에는 중앙 협회의 연변분회가 있다.

예컨대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와 같이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촬영 등의 연변분회가 있으며, 이들에 속한 사람이 400여 명에 달한다.

연변에는 12개의 월간 문예지가 있어 문학활동이 활발하다. 이들 12개의 월간지 중 순수문예지는 『천지』를 비롯해 『아리랑』 · 『봄노래』 등이고 그 밖에 『주부생활』 · 『연변여성』 · 『소년아동』 · 『청년생활』 등으로 특성화하였다. 이들 잡지에도 문학작품이 많이 실려 있다.

또한 북경, 장춘, 길림, 목단강 등지에서 발행하는 월간 문예지에도 연변 사람이 원고를 보내고 그 곳 작가들이 연변 잡지에 출판하기도 한다. 물론 단행본으로 단편 · 장편의 문학작품이 많이 출판되었다.

연변에는 예술단으로 연변가무단 · 연변신극단 · 연변구연단 그리고 연변경극단이 있다. 구연단이란 서커스단을 말한다. 1954년 「춘향전」을 시작으로 연변가무단은 150여 회의 공연을 하였고 280여 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춘향전」 · 「심청전」 · 「콩쥐팥쥐」와 같은 작품은 연변 이외의 모든 한인들에게까지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고, 「춘향전」은 전중국 제1차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작품으로 뽑혔다.

단원 216명으로 구성된 연변가무단은 건국 30주년 전중국공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고 연변아동문예단과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가질 정도로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연변에는 일간지 『연변일보』가 있다. 1946년 길림성 공산당기관지인 『길림일보(吉林日報)』가 한글판 · 중국어판으로 각각 발행되었는데, 중국어판 『길림일보』는 그 뒤 길림시로 옮겨가고 1948년 한글판 『길림일보』가 『연변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연변공산당기관지가 되었다.

문화혁명기간에 신문사 역시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1980년에 와서 그것이 원상복구되면서 『연변일보』는 발행부수가 7만여 부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 한글판은 5만여 부나 발행되었다. 현재 『연변일보』는 4절지 4면의 일간지로 신문사 직원이 338이나 되는 큰 일간지이다.

연변의 방송은 1948년 방송국을 연변지구위원회의 직영으로 하여 중앙방송국의 시사보도 외에 조선어방송을 하다가 다음해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 방송국은 1974년부터 길림성 전체의 조선어방송을 맡아 매주 세 차례씩 전 길림성 뉴스를 보도하여 왔다. 1978년에는 연변방송예술단을 두었고 자치주 내에 8개 중계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유선방송이 1951년부터 시작되어 오늘날 연변 전지역에서 한국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TV방송국은 1974년 10월에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소수민족지구 가운데 맨먼저 세워진 것이다. 그 뒤 10개 소의 중계방송소를 세웠다.

광복 후 체육기구는 1951년 중화체육총회 연변분회 및 각 현의 지회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1956년부터 해마다 자치주급의 체육회를 열고 있으며 각 촌 · 향 · 현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각 대체육회를 개최하고 있다.

운동종목 가운데 가장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축구이다. 연변에는 규격을 갖춘 축구장이 377개나 되고 기성축구팀이 1,072개에 이른다. 연변체육회는 한인선수로 구성된 길림성대표축구팀과 청년축구팀을 두고 여자연식야구팀 · 속도빙상팀도 맡아 관리하고 있다.

연변 축구는 전중국 10대 팀에서 경쟁할 만큼 유명하다. 특기할 일은 최근 남한의 현대(現代) 그룹이 연변축구팀을 후원하다 별 이유없이 후원을 중단하여 사기가 저하되었고 전국 10위권에서 밀려났다.

이것을 본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최은택(崔殷澤) 교수가 연변에 여행왔다 지원하여 무보수로 축구감독을 청하고 1년간 열심히 지도하여 전 중국 10위권에 복귀하여 전 중국을 놀라게 하였다.

종교 · 신앙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아편이라 하며 금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억압을 하면서도, 특히 문화혁명시 크게 탄압을 하였으나,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고 한정된 범위에서 신앙생활을 유지케 하고 있다.

한인은 기독교(개신교) · 천주교 외에 천도교(天道敎) · 시천교(侍天敎) · 제우교(濟愚敎) · 수운교(水雲敎) · 청림교(靑林敎) · 단군교 · 대종교(大倧敎) · 원종교(元倧敎) · 태을교(太乙敎) · 보천교(普天敎) 등의 종교를 가졌다. 유교와 불교 신도 또한 많다.

유교

1913년 용정현 개산둔 문암동에서 유림 100여 명이 모여 북경공교총회(北京孔敎總會)의 간도분회 공교회를 결성한 바, 이 공교회는 반일저항운동을 벌였다.

한편 1920년초 용정에다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를 세웠다. 1933년 유교의 각파는 용정에서 동만유교회(東滿儒敎會)를 결성하였는데, 그 회원수는 1만 7,700명에 이르렀다. 광복 후 유교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사상적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다.

불교

두도구의 연명사, 노초산의 법립사, 풍두산의 학룡사, 용정의 귀두사 등의 사찰에 2,424명의 신도가 있었다. 1930년대에 화룡현 용화산의 정수암, 도문의 감로사 · 화엄사, 혼춘현의 명보사 · 천수암 등의 사찰이 있었다. 광복 후 불교도 쇠퇴하였고 노승들이 개별적으로 남아 있는 정도이다.

천도교

1922년 용정에 종리원(宗理院)을 설치하고 동흥중학교를 비롯하여 각지에 전교소를 세웠다. 1920년대 말 간도에는 2,000여 명의 교도가 있었는데, 당시 교도들은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20년대 중기 이후 천도교 내에 친일세력이 대두하여 신 · 구 두 파로 분열되었다. 친일의 신파가 우세하였으나 점차 교도들의 외면으로 끝내 와해되고 말았다.

대종교

처음에는 화룡현을 거점으로 하였다가 뒤에 왕청으로 옮겼다. 대종교는 반일독립운동을 벌여 1920년대 초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간도 북쪽 영안현 일대로 옮겨갔으며,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이 쇠퇴함에 따라 교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기독교(개신교)

1903년 영국선교사들이 훈춘 및 다라즈(大拉子) 일대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1912년 훈춘에 기독교학원을 세우고, 1913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파가 용정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교세가 전간도로 확장되었다.

이어 용정에 치외법권지대가 설치되어 용정은 이 때부터 기독교의 중심지로 떠올라 중앙교회 · 남감리교회 등이 세워졌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하여 추방됨으로써 교세가 약화되었다.

천주교

1928년 연길에 교구를 설치하고 간도 4개 현의 교회를 관할하면서 안도 · 돈화까지 교세를 펼쳐 나갔다. 연길교구의 독일인 신부들은 연길 8도구(八道溝)를 중심으로 교회 51개 소, 포교소 45개 소를 설립하였고, 소학교인 해성학교 20개 교와 병원 · 요양원 · 양로원 등을 경영하였다.

태평양전쟁 때 독일인 선교사들은 일본의 보호 아래 추방되지 않아 신도수가 1만 4,800여 명에 달하였다. 광복 후 천주교는 개신교와 함께 몰락하였고, 외국인 신부들은 추방당하였다.

문화혁명 후 오늘의 종교활동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믿고 안 믿고는 자유이고 관리들이 보호나 단속을 하지 않으며 헌금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종교의 발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주생산물

연변을 포함하여 중국의 한인이 공헌한 것이 벼농사이다. 처음 해란강을 따라 용정에 자리잡은 한인들이 벼농사를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중국의 벼농사는 양쯔강 이남에서나 재배되었고 특히 만주 북간도는 추운 곳이라 벼농사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 곳에 한인이 거주하면서 중국인 · 만주인이 밭농사에 쓸모없다고 버린 늪지대를 논으로 만들고 벼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은 한인을 ‘물오리’라 부르기도 했다.

연변지역은 백두산 북부의 산악지대여서 벼농사 이외에 특산물로 사과배, 인삼 그리고 담배가 유명하다. 사과배란 사과와 배를 접목시켜 품종을 개량한 것이다. 연변 전체의 과수면적은 1만 9,000㏊이며 연간 과수생산량 5만 5,000t이다. 그 중 사과배의 경작면적은 1만 3,000㏊이며 생산량은 3만 6,000t에 달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특산물은 인삼이다. 연변 인산밭 총면적은 1,450만㎢이고, 생산량은 연간 455만㎏에 달한다. 인삼을 원료로 하는 제약공장이 14개 소나 되며 인삼가공량은 50여t에 달한다.

연변 도문강 연안의 토양과 기후는 잎담배 생산의 적지로 이 곳에서 생산되는 담배도 색깔, 향기 그리고 품질에서 우수하다. 연변 전체에서 생산되는 잎담배의 경작면적은 1만 6,900여㏊이고, 1991년 현재 잎담배 수매량이 2만 2,050t에 달한다.

민속

연변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비롯한 민속은 한마디로 함경도에서 옮겨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연변에서는 최근까지 한국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어 1980년말부터 접촉하기 시작한 남한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먼저 복식문화를 살펴보면, 남성들은 저고리와 바지 그리고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썼다. 여성들은 저고리 · 치마 · 바지 · 외투를 입고 머릿수건을 썼는데 그 종류와 양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한인들의 옷 · 신 · 양말 · 모자 등은 20세기 초부터 자본주의적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계몽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즐겨 입던 흰옷이 여러 가지 색깔로 바뀌었고 거기에다 양복을 입기 시작한 점이다. 젊은 여성들은 실용적인 옷을 입고, 남자들은 상투 대신 하이칼라 머리를 하거나 삭발하였다. 처녀들은 댕기를 땋았고 시집간 여성들도 쪽을 지거나 파마를 하였다.

연변의 음식도 함경도 음식이 주류를 이루며 식사법도 함경도식이다. 음식은 평소음식과 특별음식으로 나눌 수 있다. 평소음식으로는 쌀밥 · 조밥 · 국 · 반찬 등이 있고, 배추김치는 겨울철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민족특유의 부식물이다.

특별음식에는 떡과 당과류 및 냉면 등이 있으며, 요리의 종류도 퍽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열구자탕 · 매운탕 · 불고기 · 화채 · 수정과 등이 유명하다. 술 종류로는 빼주[白酒:배갈] 외에 과일술이나 곡주가 있는데, 특히 막걸리는 농촌에서 여전히 손쉽게 만들어 먹고 있다.

또한 개고기는 빼놓을 수 없는 육식의 하나로 요즈음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애호된다. 그러나 잔치 또는 명절 때에는 개를 잡지 않으며 먹지도 않는다.

가옥도 함경도식 가옥이다. 한인들이 거주하는 집은 초가집도 중국인의 집과 구별된다. 한인들의 집 지붕은 배를 엎어놓은 것과 같이 맞배지붕이고, 중국인의 지붕은 널판 두 장을 맞대어 놓은 것 같은 지붕이다.

함경도식 집은 부엌과 방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큰 방 한 면에 솥을 나란히 걸고 부뚜막이 방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 한모퉁이를 막아 물건을 두고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잔다.

혼례에서는 중매결혼이 성행하며 동성동본이나 내외종친 사이에는 결혼하지 않는다. 오늘날 전통적인 혼례식이 서양의 신식결혼과 혼합되어 중국 한인 특유의 예식절차를 갖게되었다.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한복에 면사포를 쓴다. 대부분 음식점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주례가 신랑과 신부를 소개하고 내빈의 축사가 있으며 끝으로 신랑측 대표의 인사가 있다. 피로연에 비용이 많이 들고 거창하게 치른다.

또 백일이나 돌, 회갑 등도 여전히 중요하게 치른다. 크게 변한 것이 장례식이다. 중공(中共)이 성립된 이래 화장을 장려하며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화장을 한다. 따라서 장례 의식도 간단하다.

명절은 중국인과 같이 설날을 지낸다. 중국인은 설을 춘절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기고 보름까지 계속 논다. 한인들은 설 다음으로 추석과 단오를 큰 명절로 여기며 특히 8월 15일을 노인절로 정해 한인들의 공휴일로 지내고 있다.

유적 · 유물

먼저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안도인(安圖人)의 유적지가 손꼽힌다. 이것은 1963년 안도현 명월 동남쪽 부르하통하 강변의 석회암동굴에서 발견된 유적지이다. 고대인의 화석과 함께 동굴의 퇴적층에서 19종의 동물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코뿔소 · 코끼리 등 포유동물의 화석이었다.

이빨화석은 고대인 것이고, 동물화석은 안도인이 살았던 구석기 후기의 것이다. 다음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로 용정현 덕산향 금곡저수지 서북쪽 언덕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집터 6개 소가 있다. 연대는 약 4,500년 전으로 올라간다. 유물수는 350여점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는 돌호미 · 돌도끼 · 돌턱자귀 · 돌끌 · 석마판 · 석마봉 등의 뗀석기 및 간석기가 있고, 사슴뿔로 만든 그릇과 뼈송곳 및 뼈바늘, 그리고 바다조개로 만든 도구와 많은 토기도 출토되었다. 기물 종류로는 독 · 단지 · 버치 · 사발 · 잔 등이 나왔다. 청동 · 철기시대의 유적지는 상당히 많다.

이 시대의 유적지와 무덤은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 · 부르하통하 · 가야하 · 혼춘강 · 목단강 · 수분하 등지에서 50여 개 소나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연길시의 소영자무덤과 공원의 흙무리 유적지, 왕청현의 안전 · 나자구 유적지와 산화 천교령(天橋嶺) 금성무덤, 그리고 용정시의 금곡무덤과 유정동 · 조동 유적지, 훈춘시 남단산의 일송정 유적지, 도문시의 석현무덤 등이 손꼽힌다.

출토품은 주로 간석기 · 골기 · 토기 등이고, 장식품으로 옥석주 · 구슬대롱 · 비취드림 · 뼈대롱 · 멧돼지이빨장식품 등이 있으며, 청동으로 만든 구리단추 · 구리팔찌도 출토되었다. 백초구(百草溝)에서는 쇠찌 · 철기조각, 점술용(占術用)의 복골(卜骨)이 나왔는가 하면, 나자구(羅子溝)에서는 곡물저장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발해시대의 유적지로는 도성(都城)으로 돈화시 동쪽에 오동성(傲東城)이 있고, 오동성 남쪽 육정산(六頂山)에는 큰 무덤군이 있다. 그 중 발해 3대왕 대흠무(大欽茂)의 둘째딸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는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다.

1949년 정혜공주묘 발굴 때 묘비와 한 쌍의 돌사자가 발굴되었다. 또 훈춘현에서도 읍성 4개와 산성 2개, 절터 4곳, 탑터 1곳, 무덤 4개가 발견되었다. 제일 큰 성은 팔련성(八連城)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연꽃잎무늬막새 · 손가락무늬기와 · 녹유기와 · 문자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화룡시에도 발해성터 2개, 무덤 3개, 절터 2개가 있으며, 서성향의 동쪽에 서고성(西古城)이 있다. 서고성에서 서남쪽 방향에 있는 팔가자지구에 수백 개의 발해무덤군이 존재한다. 또한 서고성 남쪽에 하남둔 옛성인 허래성이 있다.

1980년에는 화룡시 용수향 용해촌의 용두산에서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에서 묘비와 벽화 등 많은 문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 정효공주의 묘비와 벽화의 발견은 발해국의 역사 · 제도 · 법령 · 사상 ·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세계의 한민족』중국편(권태환, 통일원, 1996)
『재중 한인』인류학적 접근(이광규, 일조각, 1994)
『중국연변의 조선족』(한상복·권태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延邊朝鮮自治州槪況』(延邊朝鮮族自治州執筆小組, 延邊人民出版社, 1984; 大陸文化硏究會, 1991)
집필자
조흥윤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