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무숭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 · 동북면행영병마사 · 판상서형부사 ·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명
왕무숭(王務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어사대부, 동북면행영병마사, 판상서형부사,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관련 사건
교위 거신의 모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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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왕무숭은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 동북면행영병마사, 판상서형부사,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딸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예와 혼인하여 선종의 후비 정신현비 이씨를 낳고 정신현비가 다시 예종의 후비 경화왕후 이씨를 낳음으로써 상당군대부인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무숭은 교위 거신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왕정과 함께 안동으로 쫓겨났다.

정의
고려 전기 문종 때, 어사대부 · 동북면행영병마사 · 판상서형부사 ·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청주(淸州). 왕무숭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에 따르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문현공(文顯公) 이예(李預)의 둘째 부인이자 이공수(李公壽)의 계모(繼母)인 상당군대부인(上黨郡大夫人) 왕씨가 왕무숭의 딸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왕무숭은 왕가도(王可道)와 같은 청주 왕씨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이예의 딸인 정신현비(貞信賢妃) 이씨를 일찍이 후비(后妃)로 맞이했던 선종(宣宗)이 1086년(선종 3)에 이예의 처 왕씨에게 내직(內職)을 주어 왕태후(王太后)의 궁관(宮官)으로 삼았던 사실을 고려할 때, 왕무숭의 딸인 상당군대부인은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정신현비 이씨의 생모였을 가능성도 높은데, 이 경우에 상당군대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정신현비의 딸로서 뒷날 예종(睿宗)의 후비에 오른 경화왕후(敬和王后) 이씨를 어려서부터 키웠던 외조모라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에는 왕무숭의 아들도 확인된다. 교위(校尉) 거신(巨身)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함께 안동(安東)으로 쫓겨났던 왕정(王珵)이 그 사람이다. 그러나 4에서는 그가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아들이고 안동으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왕무숭은 1052년(문종 6) 4월 중추원 좌부승선(中樞院左副承宣)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의 이름만 왕무숭(王務崇)이고 그 이후의 기록은 모두 왕무숭(王懋崇)으로 나온다. 그는 1053년(문종 7)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내고, 1057년(문종 11) 3월에 어사대부(御史大夫), 1061년(문종 15) 정월에 호부상서(戶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같은 해 9월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냈다. 또한 1063년(문종 17) 8월에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1068년(문종 22) 정월에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1071년(문종 25) 5월에 중서시랑(中書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보면 왕무숭은 문종(文宗)대에 요직을 역임하면서 왕의 측근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071년(문종 25) 9월에 왕이 중양절(重陽節)을 맞이하여 상춘정(賞春亭)에 나가서 태자·계림후·평양후와 함께 재상 이유충(異惟忠)·왕무숭 등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들에게 각각 말 한 필씩 주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무숭은 1072년(문종 26) 7월에 발생한 교위(校尉) 거신(巨身)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 교위 거신이 일찍이 문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의 넷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 1021∽1069)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이다.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이러한 사실을 고발하자, 거신의 목을 베고 그 일족까지 모조리 처형하였다. 평양공 왕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아들 왕진(王璡)을 해남(海南)으로 유배 보내고 왕영(王瑛)은 나이가 어리다고 처벌을 면하였다.

평장사 왕무숭은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와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하여 왕무숭이 그의 아들 왕정(王珵)과 함께 안동(安東)으로 쫓겨나고, 장녕궁주와 수안택주는 곡주(谷州: 현, 황해도 곡산군)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문종의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설치에 따른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

단행본

김용선 편,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출판부, 2001)
박용운, 『고려시대사(상)』 (일지사, 1986)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논문

최혜숙, 「고려시대 남경 설치배경에 대한 재검토」 (『사학연구』 58·59, 한국사학회, 1999)
채웅석, 「고려문종대 관료의 사회적 위상과 정치운영」 (『역사와 현실』 27, 한국역사연구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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