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무숭(王懋崇)은 1052년(문종 6) 4월에 중추원 좌부승선(中樞院左副承宣), 1057년(문종 11) 3월에 어사대부(御史大夫), 1061년(문종 15) 정월에 호부상서 판어사대사(戶部尙書判御史臺事), 같은 해 9월에 중추원사(中樞院事), 1063년(문종 17) 8월에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1068년(문종 22) 정월에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1071년(문종 25) 5월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로써 보면 왕무숭은 문종대에 최고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종의 측근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종 25년 9월에 왕이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을 맞이하여 상춘정(賞春亭)에 나가서 태자·계림후·평양후·재상 이유충(異惟忠)·왕무숭 등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들에게 말 한 필씩을 주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찍이 교위 거신(巨身)이란 자가 문종을 폐위시키고 그 동생 평양공 왕기(王基: 1021∼1069, 고려 8대 현종의 넷째 아들)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음모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은 1172년(문종 26)에 병사 장선(張善)이란 자가 이 음모를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드러났고, 그 결과 거신의 목을 베고 그 일족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으며 왕기는 이미 죽었으므로 그 아들 왕진을 해남에 유배 보내고 왕영은 나이가 어려서 화를 면하였다.
이 사건에 평장사 왕무숭, 장녕궁주 이씨, 수안택주 이씨 등이 관련되었으므로, 왕무숭과 그의 아들 왕리(王理)는 안동으로, 장녕궁주와 수안택주는 곡주로 각각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아마도 문종의 남경(南京) 설치에 따른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