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효린(王孝隣)은 백제 무왕 8년(607)에 좌평의 관등에 있으면서 수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위덕왕(威德王) 45년(598) 장사(長史)의 벼슬로 수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제(文帝)에게 고구려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던 왕변나(王辯那)와는 같은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왕변나 · 왕효린 등이 주로 수나라와 외교를 전담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중국계 백제인이다. 중국계 백제인들은 대중 외교에 필요한 예법(禮法), 대화술, 문서 작성법 등의 교육을 가업(家業)으로 전승하였으며, 가학(家學)을 통한 후세 교육과 가업의 계승을 통해 중국 출신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한편 왕효린이 죄평의 관등에 오르고 있고, 왕변나가 수나라 외교 사절단의 대표인 장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제1급의 귀족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왕변나 · 왕효린 등으로 대표되는 왕씨(王氏) 세력은『수서』 권 81 「백제전(百濟傳)」에 나오는 사(沙) · (燕) · 협(劦) · 해(解) · 정(貞) · 국(國) · 목(木) · 백(苩) 씨 등의 이른바 대성팔족(大姓八族)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다.
그런데 왕효린이 백제의 최고위인 좌평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왕씨 세력은 수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가져올 파장을 염려한 위덕왕과 무왕 대에 백제와 수나라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급격히 성장한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왕씨 세력들은 친왕(親王) 세력으로 중국의 정치 문화에 친숙하고 이중 언어 구사 능력이 있는 것을 기반으로 위덕왕과 무왕을 도와 백제가 중국 정세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