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달지(達之). 우의정 윤사흔(尹士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이다. 아버지는 사의(司議) 윤임(尹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여석(金礪石)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예조좌랑·사간원정언·의정부사인, 사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집의에 제수되었고, 전한을 거쳐 동부승지로 재직 중 전교(傳敎: 임금의 유시)를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추고당하였다. 그 뒤 1533년(중종 28)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대사성에 발탁되어 정심잠(正心箴)을 올려 표리(表裏: 옷감)가 하사되었다.
한효원(韓效元)·김근사(金謹思) 등과 함께 「유생권학절목」을 입계(入啓: 대궐로 들어가 구두로 왕에게 보고하거나 간단한 글로써 올림)하였다. 1535년(중종 30) 좌승지·우승지·충청관찰사, 이듬해 예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면서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로 차출되었고, 동시에 세자빈객의 직을 수행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으로 근무 중 병세가 위급하자 중종이 내의(內醫)를 보내고 약이 하사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1517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책립 후 왕후의 숙부로서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와 알력을 빚었고, 이언적(李彦迪)·윤원로(尹元老) 등과 차례로 손잡고 김안로(金安老) 제거를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였다. 그 뒤 대윤파의 윤임(尹任)과 결탁하여 김안로를 제거하고 외척 등장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