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안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우승지,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달지(達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38년(중종 33)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예조좌랑|집의|동부승지|황해도관찰사|병조참판|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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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우승지,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달지(達之). 우의정 윤사흔(尹士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이다. 아버지는 사의(司議) 윤임(尹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여석(金礪石)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예조좌랑·사간원정언·의정부사인, 사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집의에 제수되었고, 전한을 거쳐 동부승지로 재직 중 전교(傳敎: 임금의 유시)를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추고당하였다. 그 뒤 1533년(중종 28)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대사성에 발탁되어 정심잠(正心箴)을 올려 표리(表裏: 옷감)가 하사되었다.

한효원(韓效元)·김근사(金謹思) 등과 함께 「유생권학절목」을 입계(入啓: 대궐로 들어가 구두로 왕에게 보고하거나 간단한 글로써 올림)하였다. 1535년(중종 30) 좌승지·우승지·충청관찰사, 이듬해 예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면서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로 차출되었고, 동시에 세자빈객의 직을 수행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으로 근무 중 병세가 위급하자 중종이 내의(內醫)를 보내고 약이 하사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1517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책립 후 왕후의 숙부로서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와 알력을 빚었고, 이언적(李彦迪)·윤원로(尹元老) 등과 차례로 손잡고 김안로(金安老) 제거를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였다. 그 뒤 대윤파의 윤임(尹任)과 결탁하여 김안로를 제거하고 외척 등장의 길을 열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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