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중평(仲平). 윤희장(尹希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처관(尹處寬)이다. 아버지는 참찬 윤효손(尹孝孫)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의 딸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근무하던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주서 등을 역임하였다. 1510년(중종 5) 경연검토관의 공으로 별조궁(別造弓: 특별히 제작한 활)이 하사되었다.
1514년 홍문관부수찬·수찬에 올랐다가 박상(朴詳)·김정(金淨)의 사건이 일어나자, 양시지론(兩是之論: 자기의 입장을 미룬 채 양쪽이 모두 옳은 측면이 있다는 견해)을 주도하여 훗날 사림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정언에 제수되어 대사헌 성몽정을 탄핵하여 체직(遞職: 관직의 교체)시켰다.
사헌부지평으로 근무시 고향인 남원 만복사(萬福寺)의 부처 속에 있는 물건을 유생이 훔쳐간 사건이 일어나자 앞장서 추국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불가(佛家)를 비호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어 1517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정조(政曹)에 합당한 인물이 아니라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이 후 헌납·장령·부교리·교리를 거쳐 장령으로 재임용되었다가 전라도체찰사(全羅道體察使) 종사관, 부응교를 지낸 뒤 1522년에는 전라도어사, 전한을 거쳐 이듬해 사인(舍人)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의주목사·동부승지·황해감사·형조참의·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