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상정리 조씨 고가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조선 후기~근대기에 조성되어,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에 있는 창녕조씨 고가.
이칭
약칭
상정리 조씨 고가
유적/건물
건축 양식
안채 민도리 3량 팔작지붕|사랑채 민도리 5량 팔작지붕
건립 시기
1948년 사랑채 중수|1949년 안채 중수
정면 칸수
안채 5.5칸|사랑채 3칸
측면 칸수
안채 1.5칸|사랑채 2칸
정면 너비
안채 1,394㎝|사랑채 697㎝
측면 길이
안채 493㎝|사랑채 486㎝
건물 층수
1층
규모
안채 8.5칸|사랑채 6칸
소재지
경상남도 의령군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경상남도 시도민속문화재(1993년 12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의령군
내용 요약

의령 상정리 조씨 고가(宜寧 上井里 曺氏 古家)는 조선 후기~근대기에 조성되어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에 있는 창녕 조씨 고가이다. 1993년 지정된 경상남도 민속문화재로 대문채, 사랑채, 마굿간채, 중문채, 안채, 고방채, 가묘, 별채, 광채 등 9채로 구성된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이다. 사랑채의 겹집 구조, 안채의 전후좌우 툇집 및 공루의 특성은 근대적 변천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정의
조선 후기~근대기에 조성되어,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에 있는 창녕조씨 고가.
건립 경위

창녕조씨(昌寧曺氏) 현감공파(縣監公派) 1세 조충가(曺忠可)는 함안에 거주하였으며, 2세 조달하(曺達夏, 1469~1494)가 의령군 가례면 수성리로 이거하였다. 4세 조계헌(曺季憲, 1537년생, 후릉참봉)은 둘째 아들로 남쪽 7㎞ 거리의 화정면 상정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큰아들 조사남(曺士男, 1560~1592, 장악원 주부)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좌장군(左將軍)으로 참전하여 기강전투(岐江戰鬪)에서 순국하였다. 이 집은 셋째 아들 5세 조사영(曺士英)의 후손인 10세 조유성(曺有成, 1750~1808)이 살림을 많이 일구어 현재의 주택을 신씨로부터 매입하였다. 14세 조균호(曺均灝, 1854~1899)는 1890년대에 사랑채를 신축(진양군에서 매입 후 이전)하였다. 15세 조기현(曺岐鉉, 1872~1953)은 최익현(崔益鉉)주25으로 3·1운동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1915년에 별채를 주27, 1924년에 가묘(家廟)를 건축하였으며, 1948년에 사랑채를, 1949년에는 안채를 중수하였다. 현 종손은 19세 조병구(曺炳球, 1947년생)이다.

형태와 특징

의령읍의 남산인 벽화산(522.1m)을 북쪽 주30으로 한 화정면 상정리는 소하천을 사이에 둔 넓은 평지의 마을이다. 이 마을 가운데의 넓은 평지에 이 주택이 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가 직선축의 三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배치를 바탕으로 사랑 마당의 동측에는 마굿간이 있고, 서측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를 중심으로 중문채, 고방(庫房)채 및 사랑채가 튼ㅁ자형으로 둘러싼 안마당이 있고, ㄱ자형의 고방채 앞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안채 동쪽으로 사당(祠堂)주34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채의 서쪽 후면으로는 별채와 광채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별채 마당의 영역을 이룬다. 따라서 이 주택은 세 마당 집의 구성을 취한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 구성이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대문의 서측은 고방, 동측은 외측(남자용 화장실)이다.

사랑채는 대문에 거의 정면해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2칸 구성의 겹집이다. 동측으로 전면 2칸의 마루를 두고, 서측으로 전면 1칸, 깊이 2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중앙 마루를 전후로 깊게 만들고 후면에 주36를 두었는데, 최근에 보수를 하면서 뒷벽을 막았다. ㄴ자 모양으로 구성된 마루의 후면 모서리에는 온돌방을 두었는데 그 방을 빈소방이라 부른다. 사랑채는 주37의 퇴적암 기단에, 다듬은 퇴적암 주1을 받치고, 마루의 두 기둥은 주2로 나머지 기둥은 주3로 하였다. 기둥머리는 전체적으로 도리의 높이가 같은 주39 구성이며,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마루 중앙에 굽은 도리를 장식적으로 추가하여 그 하부에 태극문(太極紋)을 먹으로 그렸다. 주5주6로 받쳤고, 주7주8으로 받쳤다. 전면 추녀 아래의 달 주41[懸臺工]은 소박하게 주9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인데, 박공(牔栱)의 위치를 안쪽으로 쏠리게 하여 용마루의 길이가 조금 짧아 보인다. 사랑채의 상량(上樑) 주11에 “단기(檀紀) 4281년 무자(戊子, 1948)”라고 쓰인 중수 연도가 있다.

사랑채의 동측 후면에 서향한 중문채는 주43채라고도 하는데, 중문과 안채로 향한 주44을 가진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남향한 안채가 있는데 전면 5.5칸 측면 1.5칸의 툇집으로 전후좌우 주46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1칸 안방과 1칸 마루, 1칸 건넌방의 구성에 안방에는 부엌의 전면으로 주47방이 딸려 있고, 건넌방에는 주13인 공루청(空樓廳)이 부속되어 있는 구성이다. 공루청은 전후 2칸의 넓은 마루로 주로 남부 지방의 상류 주택에서 안채의 다양한 생활 양식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침모방 옆으로는 다시 툇마루를 두어 음식을 준비하는 반빗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후면의 부엌은 이 지방의 일반적인 부엌 공간보다 넓게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기단은 두벌대로, 퇴적암을 다듬은 석재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초석은 방형으로 다듬은 것을 사용하였다. 공루 중앙의 초석은 팔각형으로 다듬었다. 기둥 머리는 거의 납도리 구조로 구성하였지만 공루의 측면에 있는 중앙 기둥은 주15 위에 도리를 얹는 주50 구조로 하였다. 가구는 3량(三樑)에 홑처마로 조성하였다. 공루 상부의 연등천장(椽燈天障)은 측면 중간 기둥에서 동자주 위로 충량을 보내고 그 위로 추녀를 걸고 서까래는 추녀에 맞댄 형식의 주16로 배열하였는데 매우 미려(美麗)한 구조가 펼쳐지도록 구성하였다. 따라서 안채는 주로 근대적 특성의 상류 주거 형식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곳간채주51는 남부 지방에서 보기 드문, ㄱ자형의 평면이다. 흙바닥으로 된 3칸의 곳간이 서향으로 위치하고 직각으로 안채를 향하여 2칸의 공간이 있는데, 장고방(바닥을 마루로 구성), 주18이 있다. 전면 외벽은 주19, 후면의 외벽은 방화장(防火墻)으로 구성하고 지붕은 기와를 올린 것이 매우 고급스러운 고방이다. 주52 기단에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 3량 구조이며, 디딜방앗간 위는 맞배지붕, 곳간 위로는 우진각 주53으로 구성하였고, 용마루의 높이는 같도록 하였다. 그 앞에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넓은 주54을 가구식(架構式)으로 조성한 우물 정(井) 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곳간채 앞으로는 2칸으로 된 초가집인 마굿간채가 있는데, 이 공간의 중간을 담장으로 막아 사랑채와 안채 영역으로 구분하고 사랑채 담 옆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사랑채 쪽의 1칸은 마굿간이며, 안채 쪽의 1칸은 내측(여자용 화장실)이다. 이 내측의 공간은 돼지를 키우는 공간을 겸하는 곳으로 화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높게 설치하였다.

안채의 동쪽으로는 사당인 가묘가 있는데, 한식(韓式) 담장으로 방형의 공간을 구성하고, 전면 중앙에 주55을 두었다. 사당은 전면 1칸, 측면 1칸이고, 전면 반 칸의 공간은 마루 없는 툇간으로 구성하여 준비 공간을 두었고, 출입문은 4분합문(四分閤門)으로 구성하였다. 외벌대로 된 기단 위에 주57주56이다. 기둥머리는 주58에 소로수장(小櫨修粧)을 하였고, 보 위에 도리를 얹는 덧도리 구조로 만들었다. 가구는 3량의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별채는 초가집으로, 전면 4칸의 툇집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루의 전면에는 문을 두지 않은 영남 내륙 지방의 유형을 취하고 있다. 그 옆의 주22도 초가집이며 한 칸 온돌방 옆에 2칸의 흙 고방을 두었다.

의의 및 평가

의령 상정리 조씨 고가(宜寧 上井里 曺氏 古家)는 세 마당의 대규모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간은 사랑 마당과 안마당 및 별당 마당으로 구성되며, 가묘의 영역도 있다. 겹집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와 전후좌우 툇집으로 구성된 안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구성이며, 안채의 공루는 특히 상류 주거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이다. 따라서 이 주택은 18~20세기를 거치면서 증축(增築) · 개축(改築)하여 많은 변화상을 담은, 상류 주거의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창녕조씨 현감공파세보』
이호열·김광언, 『의령 상정리 조씨고가』(부산대학교 건축과학기술연구소, 2008)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www.heritage.go.kr)
주석
주1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우리말샘

주2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 우리말샘

주3

네모진 기둥. 우리말샘

주5

동자기둥에 얹어서 서까래나 지붕널을 받치는 가로재. 우리말샘

주6

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상량(上樑), 오량(五樑), 칠량(七樑) 따위를 받치고 있다. 우리말샘

주7

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우리말샘

주8

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대공. 우리말샘

주9

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상량(上樑), 오량(五樑), 칠량(七樑) 따위를 받치고 있다. 우리말샘

주11

먹물로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 우리말샘

주13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우리말샘

주15

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의 중간에 걸친 보. 우리말샘

주16

안쪽 끝을 말굽 모양으로 만들어 양쪽으로 붙이는 서까래. 우리말샘

주18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거나 빻는 집. 우리말샘

주19

널빤지로 만든 벽. 우리말샘

주22

안채에서 따로 떨어진, 광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25

문하에서 배우는 제자. 우리말샘

주27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30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운수 기운이 매였다는 산. 우리말샘

주34

네모반듯한 모양. 우리말샘

주36

툇간에 놓은 마루. 우리말샘

주37

장대석을 두 켜로 포개어 쌓아 만든 대. 우리말샘

주39

모가 나게 만든 도리. 우리말샘

주41

트러스 형태의 지붕에서 중간의 왕대공과 평행하게 놓인 작은 대공. 우리말샘

주43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우리말샘

주44

안둘렛간 밖에다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 우리말샘

주46

전후면에 툇기둥을 세우고 원채에 붙여서 지은 집. 우리말샘

주47

남의 집에 매여 바느질을 맡아 하고 일정한 품삯을 받는 여자. 우리말샘

주50

도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도리 밑에 덧대는 도리. 우리말샘

주51

한 집 안에 여러 개의 집채가 있을 때 곳간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52

장대석 한 켜로 쌓아 만든 지대. 우리말샘

주53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우리말샘

주54

널판같이 뜬 돌. 우리말샘

주55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우리말샘

주56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 우리말샘

주57

툇간에 딸린 기둥. 우리말샘

주58

기둥의 맨 윗부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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