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의 국문 필사본이며 원제목은 ‘의녈비튱효록’이다. 1898년으로 추정되는 무술년 6월 8일에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작품은 ‘설저전’, ‘설비효행록’, ‘의열왕비충효록’, ‘번설경전’ 등의 이칭으로 현재까지 11종의 이본이 발굴되었다. 이 중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의열비충효록」이 선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의 『옥소고(玉所稿)』에 「의열비충효록」의 한역본인 「번설경전」이 수록된 점으로 볼 때 17세기 후반 이전에 이 작품이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 인종 때 '설중'이라는 명관이 부인 민씨와의 사이에 '월앙'이라는 딸을 두었다. 월앙이 세 살 때 부인을 잃은 설중은 힘들여 딸을 키웠고, 월앙은 성장하면서 재덕과 미모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때 '최훈'이라는 간신이 설중의 집에 왔다가 월앙을 보고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최훈은 조회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너진 담 안의 여인을 보고 겁탈하려 하였고 그 여인은 결국 혈서를 쓰고 자살하였다. 남편 이생이 돌아와 통곡하자 최훈이 이생을 죽이려 하였고 이생은 부인의 혈서를 들고 도망쳤다.
설공이 길을 지나다가 이생을 만나 사연을 듣고 분노하여 임금에게 올릴 상소문을 써서 문갑에 넣어 두었다. 최훈의 처남인 조 진사가 설공의 집에 왔다가 우연히 문갑을 열어 발견하고는 그 상소문을 최훈에게 가져다 주었다. 최훈이 놀라 설공을 모함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먼저 올려 설공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혼자 남게 된 월앙은 최훈의 구혼에 못 이겨 자기를 대신하여 시녀 미랑을 최훈에게 시집보냈고, 자신은 남장으로 세상을 유랑하다가 청암사에서 글공부를 한 뒤 과거에 급제하였다. 월앙이 임금에게 부친 설중이 모함 받아 유배 가게 된 사연을 아뢰자, 임금은 최훈을 처벌하고 설공의 유배를 풀어 주었다.
임금이 월앙을 부마로 간택하였으나, 설공이 돌아와 월앙이 여자임을 고백하자 임금은 놀라며 둘째 아들인 성왕의 왕비로 삼고 설공에게 좌승상의 벼슬을 내렸다. 왕비는 8남 3녀를 두고 설공에게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설공은 95세, 왕은 89세, 월앙은 86세를 살다 죽었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왕비의 효(孝)와 설 승상의 충(忠)을 강조하여 두 주제를 하나의 구조 안에 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중의 충심은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 간신인 적대자 최훈과의 갈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설중의 충성을 특별히 드러내는 구조는 아니고 고전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인 삽화에 그친다.
오히려 두 사람 간의 엎치락뒤치락은 월앙의 여성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월앙은 여성 영웅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남장을 하고 지내지만 남성 영웅과 큰 차이가 없다. 적대자를 지혜로운 꾀로 물리치고 과거에 급제한 후, 임금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아 아버지를 구한다.
이 작품에는 보편적인 영웅소설과 다르게 사랑의 동기가 약화되어 있다. 영웅소설은 정치적 시련과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시련이 함께 닥쳐 그 둘을 같이 극복하는 유형이 보편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의 행복한 결혼은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뒤 주어진 보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제목과 결론에서 거듭 보이는 작자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