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뒤 1919년에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진학하였다. 일찍부터 조숙한 예술가의 재질을 보여 1920년현철(玄哲)이 세운 예술학원(藝術學園)의 연구부원으로 옮겨 연극활동의 길을 텄다.
여기에서 만난 김정원(金正元)·유수준(兪守濬)·김두현(金斗鉉) 등과 동경유학생 등을 모아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를 조직,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공연활동을 하였다. 1921∼1922년 사이에 그가 연출하여 상연된 무대작품은 <결혼신청 結婚申請>·<정조 貞操>(체호프 작)·<돌아온 아버지>(菊地寬 작)·<부활>(톨스토이 작)·<시인의 가정(家庭)>(金泳俌 작) 등이다.
한편, 이 무렵 동요·동시도 써서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한국영화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으로, 부산공연을 갔던 그는 1924년에 부산에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을 이끌고 연기진으로 입사하였다.
그는 이 회사에서 제작한 창립작품 <해(海)의 비곡(悲曲)>(1924)과 제2회작인 <운영전 雲英傳>(1925)에 윤백남(尹白南) 감독의 조감독을 겸하여 출연하였다. 이때 그는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던 나운규(羅雲奎)와 만나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또 1925년에 설립된 윤백남프로덕션의 주요 단원이 되었으며, 첫번째 각본·감독 작품은 윤백남프로덕션 제작의 <심청전>(1925)으로서,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심봉사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 윤백남프로덕션이 <심청전> 한 편을 제작하고 그는 고려키네마를 창립하고 문예영화인 <개척자 開拓者>(1925)를 감독하였다.
1926년에는 조일제(趙一齊)와 같이 계림영화사를 만들어 < 山寨王>을 각색, 감독하였고, 평양에서 <봉황의 면류관(旒冠冠)>(1926)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 단성사주(團成社主) 박승필(朴承弼)의 도움을 얻어 이경손프로덕션을 창립하고, <춘희 椿姬>·<숙영낭자전 淑英娘子傳> 등을 만들었다.
한편, 1926년에 영화소설 <백의인 白衣人>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항일색채를 띠었다 해서 일제의 극심한 압박을 받았다. 1931년에는 고국을 등지고 상해로 망명, 그곳에서 김구(金九)를 만나 임시정부를 위하여 활동하였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영화인 <이원염사 梨園艶史>를 감독하였다.
전창근(全昌根)·정기탁(鄭基鐸)·한창섭(韓昌燮) 등과 만나 망명파(亡命派)를 이루고, 영화 <양자강 揚子江>(1931, 南洋影片公司 제작)을 감독하였다. 상해에 머물면서 상해의 문단과 영화계에서 활약하다가 1932년에 윤봉길의사사건(尹奉吉義士事件)이 터지자 쫓기는 몸이 되어 태국으로 탈출하여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시나리오작가와 영화감독으로서 한국영화 초창기의 선구자적인 영화인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