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원백(源伯). 이창환(李昌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李坰)이다. 아버지는 좌랑 이태석(李泰錫)이며, 어머니는 윤해수(尹海壽)의 딸이다.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중앙의 여러 참하관을 지내고, 온양군수(溫陽郡守)에 재직하던 1726년(영조 2) 촌가(村家)를 헐어 친구의 입장(入葬: 장지로 만듦.)을 도와준 죄로 파직되었다.
1733년(영조 9) 장령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언이 되어서는 이조판서 김취로(金取魯)를 논척하였다. 그 이후 헌납·장령을 번갈아 맡았다가 1743년(영조 19) 집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부터 사간·집의에 여러 차례 교대로 제수되었다.
1745년(영조 21)에는 익산군수 김필우(金必祐)·강령현감 조봉인(趙鳳仁)·전라감사 정형복(鄭亨復) 등을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탄핵하였으나, 역심(逆心)을 품은 이덕제(李德濟)와 망측한 말을 한 윤광주(尹光周)를 탄핵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는 죄로 다른 대관(臺官)들과 함께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간으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주로 집의·사간 등의 대관직(臺官職)을 번갈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