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량(汝亮). 이동직(李東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수준(李秀儁)이다. 아버지는 이사제(李思悌)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로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의 딸이다.
1736년(영조 12) 성균관의 시사(試士)인 별제(別製)에서 진사의 신분으로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은택을 입어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0년(영조 16) 정언을 거쳐 지평으로 재직하면서 대론의 문제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 뒤 1744년(영조 20) 정언으로 복귀한 후 1747년(영조 23)에는 사간원지평, 홍문관수찬을 거쳐 부교리에 임용되었다가 어사(御使)로 파견되었다. 직을 수행하던 도중 패초(牌招: 왕이 명패로 신하들을 부름)를 어겼다는 이유로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이어 경연의 검토관, 시강관으로 재직하면서 세자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고, 그 해 말 헌납에 제수된 동시에 경기어사(京畿御史)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748년(영조 24) 교리·수찬·필선을 거쳤고, 1750년(영조 26)년에는 사간·수찬을, 1751년(영조 27)에는 겸문학·우찬독(右贊讀)·겸우익선(兼右翊善)을, 1752년(영조 28)에는 겸우찬독(兼右贊讀)·승지를 역임하였다.
1754년(영조 30)에는 대사간·승지를, 1761년(영조 37)에는 형조참판 등을 두루 거친 뒤 1763년(영조 39)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 함계군(咸溪君) 이훈(李櫄)과 함께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