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선조 30)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601년 승정원 주서를 거쳐 이듬 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이어서 병조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이듬 해 옥당(玉堂)에 선출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교리 · 세자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 · 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리와 기강에 죄를 얻음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받았다. 이어서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 있던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 해에 별세하였다.
이민성은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가 강해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 · 이원익(李元翼) ·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학사 · 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1,000여 수의 시가 전해지며, 저서로는 『경정집(敬亭集)』 ·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