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여(仲如). 아버지는 이의천(李義天)이다.
1803년(순조 3) 제술(製述)에서 수위를 차지한 다음 직부전시(直赴殿試)하여 다음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806년 홍문관부수찬으로 김구주(金龜柱)와 김일주(金日柱)에게 형률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1808년에는 경상좌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경상도의 민정을 시찰한 다음 환자(還子: 환곡)의 폐단은 바로 잡아 혁신할 것, 첩역(疊役: 여러 역을 부과함.)의 폐단을 없앨 것, 결전(結錢)을 감해줄 것 등을 청하였다.
1808년에는 부사과로 있으면서 전 경상감사 윤광안(尹光顔)의 실정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으며, 1814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조참판, 경기관찰사를 거쳐 1817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27년에는 송면재(宋冕載)·홍원모(洪遠謨) 등과 함께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