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면숙(勉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여규(李如圭)이다. 아버지는 이상정(李象鼎)이며, 어머니는 남두춘(南斗春)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5년 사간원정언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홍문관 수찬·부교리·교리, 사헌부 지평·장령 등 삼사(三司)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2월 83세의 송시열(宋時烈)이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 싸고 왕세자의 책봉이 너무 이르다는 소를 올리자, 송시열을 극변(極邊)에다 귀양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다시 그 해 5월에 숙종이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할 때 3년을 늦추어 기다리고, 그래도 뉘우치지 아니한 뒤에 비로소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였다가 국문을 당할 뻔했으나 대사간 권환(權瑍)이 소를 올려 구원하였다. 1692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에는 대사간에 이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