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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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순천의 신창교회, 황해도 배천교회, 평양의 남산현 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교육자 · 정치인.
이칭
이칭
백사(白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8월 19일
사망 연도
1975년 10월 15일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윤영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순천의 신창교회, 황해도 배천교회, 평양의 남산현 교회 등에서 목회를 한 목사, 교육자, 정치인이다. 1890년 평안북도 영변군 출생으로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해 1916년 목사가 되었다. 1919년 신창교회 목사로 독립선언강연회를 개최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파면 처분을 받았다. 1946년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던 민족통일총본부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 총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순천의 신창교회, 황해도 배천교회, 평양의 남산현 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교육자 · 정치인.
내용

1890년 8월 19일 평안북도 영변군 출생으로, 호는 백사(白史)이다. 1907년 3월 미국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영변 숭덕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9월 YMCA의 토지측량강습을 수료했다.

1910년 3월 평북 태천의 창명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후, 7월 평양 숭실사범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1912년에 졸업했다. 1913년 9월 평북 운산의 북진교회 전도사와 광동학교 교장을 겸직하면서 서울의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 1916년 목사가 되었다.

1916년 9월 평안남도 순천의 신창교회 목사와 일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19년 신창교회 목사로 재직 중 3월 5일 신창면에서 독립선언강연회를 개최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황해도 배천교회 시무 목사로 재직했으며, 1929년 7월 감리교회 감리사, 9월 대한감리회 총리원 사회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1년까지 감리사로서 진남포의 신흥리교회, 개성의 개성교회, 평양의 남산현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1936년 10월 한일 기독교 감리회 통합예비회담인 동경의 가마쿠라회의[鎌倉會議]에 양주삼(梁柱三), 신흥우(申興雨) 등 7인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 “교회통합은 곧 조선 교회의 해산을 의미하므로 결코 찬성할 수 없다”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1938년 4월 평양 광성중학교, 1939년 3월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 요한성경학교와 성림여자중학교의 설립에 참여, 이사장으로 선임되었고,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파면처분을 받았다.

해방 직후, 8월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평양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이 되었고, 11월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반대결의 밀서를 서울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자 1946년 2월 월남했다.

1946년 10월 이승만(李承晩)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던 민족통일총본부에 참여해 정경부장 및 상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장, 이북인애국단체연합회 위원장, 한국민족대표단 이사 등을 맡았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서울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남북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초대 국무총리로 국회인준을 요청했지만, 한국민주당계의 반대로 부결되었고, 이후 제1공화국 시기에 세 차례나 국무총리에 제청되었으나, 모두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초대 내각 무임소 장관에 이어 제2대 사회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52년 다시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고, 5월 신흥대학장(현 경희대학교)에 취임했으며, 7월 반공통일연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부통령 출마를 위해 무임소 장관을 사직하고, 8월 조선민주당 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5월 다시 제4대 부통령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으며, 1958년 5월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임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활동을 하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1970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1974년 10월 15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백사 이윤영 자서전 출판위원회, 사초, 1984)
『한국의 국무총리 연구』(이재원, 2006)
「백사 이윤영 옹 별세」(『매일경제』, 1975.10.16)
「정·부통령 후보자의 면모 이윤영 씨」(『경향신문』, 1956.4.18)
「해방십년의 인물들 이윤영」(『경향신문』, 195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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