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순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순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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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순천군은 평안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는 맹산군, 서남쪽으로는 평원군·대동군, 남쪽으로는 강동군·성천군, 북쪽으로는 안주군·개천군·덕천군과 접하고 있다.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의 방치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에 의해 군진이 설치되었고, 여진족에 대한 군사적 요지로 삼았다. 조선 인조대에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군사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만포선과 평원선이 일부 개통되면서 평안남도 중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계 학교와 천도교의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

정의
평안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으로는 맹산군, 서남쪽으로는 평원군 · 대동군, 남쪽으로는 강동군 · 성천군, 북쪽으로는 안주군 · 개천군 · 덕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45′∼126°16′, 북위 39°11′∼39°36′에 위치하며, 면적 1,244㎢, 인구 약 10만명(1945년 현재)이다. 1개 읍 8개 면 150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순천읍 관상리이다.

순천군의 자연환경

군의 북동부는 묘향산맥낭림산맥의 여맥이 미치어 입봉(笠峰, 880m)을 비롯한 산악이 중첩되어 있으며, 남서부에는 자모산(慈母山, 559m)이 있다. 이 밖의 지역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으며, 지층은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졌고, 곳곳에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하였다.

북동의 산악 지대와 남서의 구릉 지대 사이인 군의 중앙부를 대동강의 상류인 정융강(靜戎江)이 지류인 장선강(長鮮江)을 합치면서 남서류한다. 이들 강 유역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와 거주지로 이용된다.

기후는 내륙에 위치한 산악 지대인 만큼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9.3℃, 1월 평균 기온 -10.1℃, 8월 평균 기온 24.8℃로 기온의 연교차가 35℃에 달한다. 연 강수량 1,003㎜이다.

순천군의 역사

고대의 순천군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뒤 고구려의 발흥과 남하에 따라 미천왕 대(300∼331)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속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의 영역이었으나,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고려시대의 순천군

북진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이곳에 군진이 설치되었다. 939년(태조 22)에 은산에 성을 쌓았으며, 순천 땅을 정융군(靜戎郡), 자산 땅을 문성군(文城郡), 은산 땅을 흥덕군(興德郡, 일명 同昌郡)으로 삼고 태안주(太安州)에 소속시켰다. 그 뒤 983년(성종 2)에 고을 이름을 순주(順州) · 자주(慈州) · 은주(殷州)로 고치고, 각 주에 방어사(防禦使)를 주류케 하여 북방 여진족에 대한 군사적 요지로 삼았다.

1018년(현종 9)에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자주에서 강민첨(姜民瞻)이 적군을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해에 평안도가 북계(北界)로 개편되면서 은주 · 자주는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의 직속군이 되었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침입이 거세지자 몽고병란이 끝날 때까지 정부의 이륙취수정책(離陸就水政策)에 따라 한때 각 주 관원들이 서해 도서 지방으로 옮겨 가자, 이 지방은 몽고병에 의하여 크게 유린되었다. 몽고병란 후 순천 땅을 덕주, 은산 땅을 성주(성천)군에 편속시켰다.

몽고의 동녕부(東寧府) 관할하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충렬왕대(1274∼1308)에 다시 수복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는 각 군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의 순천군

1413년(태종 13) 서북면을 평안도로 바꾸고 지방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자산은 자산군으로 도호부사가 임명되었으며, 순천은 순천군으로 군수가 파견되었다. 이 때 종래의 은산 땅은 자산군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분리되어 은산현이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순천군 사람이 내시 김계경(金季敬)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져 순천군을 해체하고 그 땅을 강동 · 성천 · 은산 · 개천 · 안주 · 숙천 · 순안 등 주변 각 고을에 편속시켰다.

1506년(중종 1)에 순천군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순찰사(巡察使)가 주류하였다. 인조대에 들어서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국방 강화 조처가 취해졌고, 순찰사 민성휘(閔聖徽)에 의하여 1633년(인조 11) 군의 치소를 성내방의 산성 요새로 옮겼으며, 4년 뒤 평읍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 숙종 때 이세재(李世載)에 의하여 치소가 1691년부터 1706년까지 다시 산성으로 옮겨진 적이 있다. 1566년(명종 21)에는 은산군이 부로 승격되었다가 곧 현으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주인이 노복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져 순천군이 10년간 현으로 격하되었다.

근대의 순천군

1895년 을미개혁에 따라 지방 제도가 개편될 때, 순천 · 자산 · 은산의 각 군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순천군은 평안남도의 3등군이 되었고, 자산군과 은산군은 4등군으로 지정되었다. 그 뒤 1908년 은산군과 자산군은 폐지되고 순천군에 통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웃한 개천군과 관할구역의 조정이 있었으며, 군내면이 순천면으로, 인곡면이 사인면으로 개칭되었다. 1936년에는 만포선평원선이 일부 개통되면서 순천이 철도 분기점이 되자 날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1936년 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순천군은 1개 읍 8개 면 150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

순천군의 유물 · 유적

북창면 북창리에 고구려 고분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이 있다. 이 무덤은 현실(玄室)에 천왕과 지신의 벽화가 있으며, 현실 안에 기둥을 전혀 세우지 않고 석재를 십자로 교차시켜 궁륭상 천장을 독특한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불교 유적으로는 자모산 남쪽 봉린산(鳳麟山)에 503년(고구려 문자왕 12, 일설에는 이보다 이른 소수림왕대에 창건되었다고도 함.)에 건립된 거찰인 안국사(安國寺)가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천도할 때, 이 절에서 머무른 바가 있으며 순조대에 중수되었다.

성곽으로는 고려 태종대에 축성되었다는 자산면의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있다. 1621년(광해군 13)에 체찰사 이시발(李時發)의 명으로 중건되었으며, 1705년(숙종 31)에 이세재에 의하여 다시 수축되었다. 포혈이 157개소이고 돈대가 13처이며, 자연적인 지세를 잘 이용한 요새였다. 성내에는 만자루(萬子樓) · 관어정(觀魚亭) · 의열사(義烈祠) · 생사당(生祠堂)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폐허가 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또 자산의 이성(泥城)은 주위 약 360m의 석성으로, 고려 시대에 김취려(金就勵) · 조충(趙沖) 등이 거란군을 요격할 때 주둔하였던 성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또 북창면의 고읍성(古邑城)은 순천현의 첫 치소였던 곳이고, 역시 북창면에서 용연진(龍淵鎭)이 있었으나 폐허가 되어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순천읍내의 고건축으로는 관아문루이던 문고루(聞鼓樓)가 있고, 동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는 이름난 명승지인 무등대(無等臺)가 있는데, 이곳은 고읍성에 있던 치소를 옮겼던 곳이다. 은산리담첨정(澹襜亭)도 명승지로 꼽히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카르스트지형인 이곳은 석회동굴이 여러 곳에 있으며, 또한 지하수가 풍부하여 곳곳에 대규모의 용천(湧泉)이 솟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귀출천(貴出泉) · 수원천(水源泉) · 월제천(月濟泉) · 용암천(龍巖泉) · 광천(廣泉) 등이 있다.

순천군의 교육 · 문화

순천군은 비교적 일찍부터 유풍(儒風)이 강하였던 지방으로, 순천향교 · 자산향교 · 은산향교가 있고, 각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 1931년 조사에 의하면, 142개의 서당에 1,811명의 학동(學童)이 있었다고 한다.

근대 교육기관은 한말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구국 운동이 이 고장에도 번져 사학 기관에 의해서 설립되기 시작되었다. 이들 사학은 기독교 관계자와 지역의 유지들이 개설한 학교이다. 1905년 순천읍에 장로교 계통에서 설립한 의영학교(義英學校)를 시초로, 같은 해에 은산면에 장로교 계통의 명덕학교(明德學校)가 세워졌으며, 1909년 자산면에 장로교 계통의 덕림학교(德林學校), 선소면에 장로교 계통의 신민학교(新民學校), 신창면에 감리교 계통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등 기독교계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이 밖에 은산면에 김이용(金履鎔)이 세운 보창학교(普昌學校), 내남면에 문진호(文鎭鎬)가 세운 문창학교(文昌學校), 후탄면에 윤원정(尹元鼎)이 세운 광명학교(光明學校), 자산면의 명신학교(明信學校) 등이 지방 유지들에 의하여 설립되어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1년 순천보통학교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에 와서 순천읍에는 유림회에서 대동학관(大同學館)을 세웠으며, 같은 해 천도교에서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설립하였다.

또한, 군내의 교육 인사들은 농잠(農蠶)의 중요성을 깨달아 1925년 순천노농학원(順川勞農學院)과 순천양잠기술학교(順川養蠶技術學校)를 세워 기술 교육을 실시하였고, 여성 중등교육을 위하여 1943년 순천고등여학교(順川高等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성의 개화에 노력하였다.

1945년 현재 10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종교 상황으로는 불교 사찰 3개, 천주교 성당 2개, 개신교 교회 34개, 천도교 포교소 10개, 시천교 교당 1개소(1937년 현재) 등이 있고, 특히 천도교와 시천교는 민족의식 고취에 큰 공헌을 하였다.

순천군의 산업 · 교통

산지가 많아 농업은 밭농사를 주로하며, 전체 경지면적은 3만4696㏊로 논이 5,178㏊, 밭이 2만9518㏊로 밭이 85%를 차지한다. 중앙부의 대동강유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북동부의 산악 지대와 남서부의 구릉 지대에서는 밭농사가 주가 된다. 특히 산악 지대는 거의 화전민에 의해서 경작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조 · 콩 · 수수 · 밀 · 팥 · 면화 등이다. 특히 콩은 ‘순천대두’라 하여 품질이 우수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누에치기와 양봉도 활발하며 가축은 소 · 돼지 · 닭 · 면양 등의 사육이 성행하였다. 은성면 천성리에 종양장(種羊場)이 1937년에 설치되어 호주산 면양 150두를 사육, 1945년에는 600여 두로 증가하여 농가 소득에 큰 도움을 주었다.

관개 수리 시설로는 내남면의 순남저수지(順南貯水池), 자산면의 자산저수지(慈山貯水池) 등이 있어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따라서 이 지역 일대는 논농사가 활발하여 곡창 지대로 알려져 있다.

광업은 신창면 재동리에 신창탄광이 있어 연간 약 30만t 이상의 무연탄을 생산하며, 은산면에서는 금이 채굴되고, 군내 여러 곳에서 양질의 석회석이 생산된다. 공업은 순천읍에 카바이트 · 석회질소 등을 생산하는 근대적 화학공장이 있으며, 신창 · 사인 · 순천에 양조장이 있다.

상업 활동은 순천읍 관상리에 4·9일에 군내장(郡內場), 은산면 은산리에 2·7일에 은산장(殷山場), 1·6일에 신창면 신창리의 신창장(新倉場)과 내남면 중평리의 중평장(中坪場), 3·8일에 자산면 자산리의 자산장(慈山場)과 북창면 죽창리의 북창장(北倉場), 사인면 사인리에 5·8일에 사인장(舍人場)이 각각 열린다. 주요 거래품은 각종 농산물과 섬유 생산품이며, 북창장을 제외하고는 각 시장에서 가축시장이 정기적으로 개장되었다.

도로는 평양-순천-영원, 성천-순천-숙천, 순천∼자산, 자파∼은산, 순천∼개천, 성천∼신창 간 도로가 나 있으며, 철도는 평원선(平元線)만포선(滿浦線)이 순천읍에서 교차하고 있어서 평안남도 중부 교통의 요지가 된다. 또한, 대동강을 통하여 배로 평양까지 내왕하였다.

순천군의 읍 · 면

순천읍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인구 1만3307명(1938년 현재). 읍 소재지는 관상리이다. 본래 군내면(郡內面)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선도면(船島面)과 활동면(濶洞面)을 병합하였고, 1917년에 순천면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29년에 오운면(梧雲面)을 병합하였으며, 1936년에 순천읍(順川邑)으로 승격되었다.

영원군에서 발원한 대동강 상류인 정융강이 동쪽의 북창면, 선소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남류하면서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밀 · 수수 등과 특용작물로 면화 · 고추 · 깨 등이 생산된다. 평야 지대인 관계로 쌀 생산이 군내에서 제일 많다.

누에치기가 발달하여 1934년 평양시에 있던 잠농제조소가 이 읍으로 이전해 왔으며, 여자양잠강습소를 설치, 양잠지도원을 양성하여 평안남도의 각 군에 배치하였고, 농가에는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하여 책임제를 실시하였다.

축산업도 활발히 이루어져 성암리에 원종우 생산 마을을 설정하여 우량우 사육에 힘썼다. 관상리에는 우시장도 개설하여 매매 거래도 활발하다. 공업으로는 1937년 순천역 앞에 화학공장이 설립되어 비료 · 카바이드 · 산소 등을 생산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군수공장으로 전환하였다. 특산물로는 수공업으로 생산되는 면포와 명주가 유명하다.

평원선과 만포선이 순천역을 중심으로 교차하고 있으며, 도로망이 군내 각 곳을 연결하여 교통은 편리하다. 동족 마을로 마상리에 전주 최씨, 운봉리에 온양 방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고등여학교 1개교가 있다.

관상(館上) · 창(倉) · 관하(館下) · 평(坪) · 상(上) · 중(中) · 성암(城巖) · 하(下) · 송포(松浦) · 추(楸) · 초송(初松) · 원별(元別) · 운봉(雲峰) · 마상(馬上) · 용소(龍沼) · 강포(江浦) · 전산(錢山) · 서변(西邊) 등 18개 이가 있다.

내남면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9,528명(1938년 현재). 내남면(內南面) 소재지는 중평리이다. 본래 개천군에 속하여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이속되었다. 서쪽의 신리에 국사봉(國師峰, 344m)이 솟아 있으며, 안주군에서 흘러오는 정융강의 지류가 면의 중앙을 동남류하여 순천읍과 자산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정융강과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밀 · 수수 등과 특용작물로 면화 · 고추 · 깨가 생산된다. 1932년 순남수리조합이 준공된 뒤부터 남부 일대는 전천후 농경지로 쌀 생산이 많다.

누에치기는 평안남도 내의 모범 지역으로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토록 하였고, 양잠지도원이 각 면을 순회하면서 과학적으로 연구 개발한 양잠법을 지도하여 질적으로 우수한 누에고치가 생산된다.

축산은 예로부터 농가의 소득 자원으로 큰 몫을 하여 왔으며, 원종우 생산 마을을 설정하여 우량우 사육에 힘쓰고 있으며, 가축 시장을 개설하여 매매 거래도 활발하였다.

교통은 순천역을 기점으로 만포선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순천∼안주를 잇는 도로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지난다. 동족 마을로 용천리에 양주 김씨, 금곡리에 밀양 김씨, 지상리에 광주 이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중평(中坪) · 각암(閣巖) · 용천(龍泉) · 금평(金坪) · 지상(支上) · 지하(支下) · 사평(沙坪) · 금곡(金谷) · 원봉(元峰) · 신(新) · 매남(梅南) 등 11개 이가 있다.

북창면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7,224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창리이다. 본래 진북면(鎭北面)과 함오면(咸吾面) · 마산면(馬山面) · 인산면(仁山面) 등 4개 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4개 면을 병합하여 북창면(北倉面)이 되었다.

서쪽의 용하리에 오봉(五峰, 270m)이 솟아 있고 동북쪽 개천군과의 경계선에 입봉이 있으며, 영원군의 소백산에서 발원한 정융강이 서쪽 순천읍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류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수수 · 옥수수 등이 있으며, 이 중 쌀 생산이 제일 많다. 특용작물로는 면화 · 고추 · 깨 등도 생산된다.

누에치기는 평안남도 내의 모범 지역으로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하여 누에치기가 매우 활기를 띠고 있다.

축산은 예로부터 농가 소득 자원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여 왔으며, 원종우 생산 마을을 설정하여 우량우 사육에 힘썼으며, 양돈 · 양계 · 양봉 등도 활발하여 농가 소득에 큰 몫을 한다. 교통은 순천읍에서 개천까지 연결된 도로가 면의 서부를 통과하고 있으며, 유적으로는 북창리에 고구려 시대의 고분인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이 있다.

동족 마을로 구상리에 해주 오씨, 용악리에 곡산 강씨, 중흥리에 전의 이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북창(北倉) · 오상(鰲上) · 중상(中上) · 중하(中下) · 구상(舊上) · 용하(龍下) · 중흥(中興) · 용악(龍岳) · 한령(汗嶺) · 부윤(富潤) · 인산(仁山) 등 11개 이가 있다.

사인면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8,244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인리이다. 본래 인동면(麟洞面)과 용곡면(龍谷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2개면을 합하여 인곡면(麟谷面)이 되었고, 1917년 사인면(舍人面)으로 개칭하였다.

면의 동부 경계에 백족산(百足山, 394m), 소사산(蘇射山, 354m)이 솟아 있으며, 자산면의 자모산에서 발원한 정융강의 지류가 면 북변을 횡단하여 후탄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정융강에 합류한다.

농업은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 평야 지대에서는 쌀이 생산되며, 그 밖에 조 · 보리 · 콩 · 팥 · 밀 · 수수 등의 잡곡류도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목화 · 고추 · 깨 등이 재배되며, 누에치기는 평안남도 내의 모범 지역으로 개량뽕밭 · 간작뽕밭 등을 조성하여 재래식 양잠 방법에서 탈피, 양잠지도원의 지도를 받아 과학적인 양잠 기술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축산은 농가 소득 자원의 원천이며, 원종우 생산 마을의 설정, 가축 시장의 개설 등으로 활발하다. 광업은 1900년대 영국인이 개발한 사인금광이 있었다.

교통은 평원선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도로가 철도 연변을 따라 지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안국리의 봉린산(鳳麟山)에 고구려 문자왕 때 건립된 안국사(安國寺)가 있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역사가 깊으며, 경내에 사적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사인(舍人) · 반송(盤松) · 봉학(鳳鶴) · 안국(安國) · 석우(石隅) · 사창(社倉) · 청옥(靑玉) · 옥전(玉田) · 군신(君臣) · 삼화(三花) · 덕산(德山) · 송령(松嶺) 등 12개 이가 있다.

선소면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7,329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연당리이다. 본래 소상면 · 소하면 · 선원면(仙院面) 등 3개 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3개 면을 병합하여 선소면(仙沼面)이 되었다.

면의 서쪽 순천읍과의 경계에 정융강이 남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신창면의 숭아산에서 발원한 장선강이 은산면을 거쳐 흘러들어 정융강과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밀 · 수수 등이 있으며, 평야 지대로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쌀 생산이 제일 많다. 특용작물로는 면화 · 고추 · 깨 등이 생산되며, 이 중 면화는 예로부터 재래면을 재배해 왔으나 근래에 와서 품질의 개량, 집약 재배 등을 실시하여 면화 생산이 더욱 활발하였다. 누에치기는 평안남도 내의 모범 지역으로 농가마다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하여 누에치기에 힘써 농가 소득 증대에 한몫을 한다.

축산 역시 농가 자원으로 비중이 높아 집집마다 농우 사육과 원종우 생산 마을을 군내 곳곳에 설정하여 우량우 사육에 힘썼다. 한편, 가축시 장도 개설하여 매매도 활발하였다. 특산물로는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는 명주가 유명하다.

교통은 평원선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도로망이 연답리를 중심하여 서북쪽으로는 안주군 신안주에, 동북쪽으로는 맹산에 연결되어 있다.

동족 마을로 연당리에 배천 조씨, 간동리에 남평 문씨, 장평리에 안성 이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연당(蓮塘) · 남포(藍浦) · 증산(甑山) · 장평(長坪) · 모학(慕鶴) · 답동(畓洞) · 간동(間洞) · 동림(東林) · 용암(龍巖) · 오천(梧泉) · 도흥(桃興) 등 11개 이가 있다.

신창면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5431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창리이다. 본래 원상면(院上面) · 원하면(院下面) · 분지면(盆池面) 등 3개 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3개 면을 병합하여 신창면(新倉面)이 되었다. 1929년에 용화면(龍化面)을 병합하였으며, 1935년에는 밀전면(密田面)을 병합하였다.

면의 동쪽 성천군과의 경계선상에 숭아산(崇娥山, 685m)이 솟아 있고, 이 산에서 발원한 장선강이 면의 남쪽을 동서로 흘러 들어가 은산면을 지나 선소면의 정융강과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녹두 · 밀 · 수수 · 옥수수 · 메밀 등이다. 면의 동북부는 산간지대로 잡곡 생산이 주종을 이루고 중서남부의 평야 지대는 쌀 생산이 많다. 특용작물로는 면화 · 고추 · 깨 등이 생산된다.

누에치기는 예로부터 농가 경제에 중요한 구실을 하여 왔으며, 자생 뽕나무 외에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하여 어느 때보다도 누에치기가 활발하였다.

축산업 역시 활발하여 집집마다 농우를 사육하였고 양돈 · 양계 · 양봉 등도 한몫을 하였다. 광업은 재동탄광이 개발되어 연 30만 톤 이상의 양질의 무연탄이 생산되었다.

교통은 평원선이 면의 중심을 동서로 통과하고, 서선중앙선이 신성천역에서 시발하여 이 면의 동북쪽을 통과하면서 재동탄광에 인입되었으며, 순천읍과 연결되는 도로가 면의 중심을 통과하여 맹산에 연결된다. 동족 마을로 삼중리에 배천 조씨, 유상리에 덕수 이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신창(新倉) · 귀천(貴泉) · 청계(淸溪) · 수원(水源) · 신이(新二) · 신삼(新三) · 신사(新四) · 마동(馬洞) · 용흥(龍興) · 숭덕(崇德) · 용승(龍昇) · 연곡(延谷) · 용암(龍巖) · 용화(龍化) · 망일(望日) · 삼중(三中) · 월포(月浦) · 재동(梓洞) · 영대(靈坮) · 은천(隱泉) · 구정(九井) · 원창(院倉) · 유상(柳上) · 숭산(崇山) 등 24개 이가 있다.

은산면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4505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은산리이다. 본래 은산군의 성내면(城內面) · 현내면(縣內面) · 후덕면(厚德面) · 풍전면(楓田面) 등 4개 면 지역이었으나, 1908년 은산군을 없애면서 순천군에 편입시켰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4개 면을 병합하여 은산면(殷山面)이 되었다. 1929년에 제현면(濟賢面)을 병합하였다.

신창면의 숭아산에서 발원한 장선강이 면의 남부를 동서로 흘러 들어가 선소면의 용암리에서 정융강과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밀 · 수수 · 면화 · 고추 · 깨 등이 있으며, 평야 지대로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 쌀 생산이 가장 많다.

누에치기가 활발하며 생산된 누에고치는 가내공업으로 명주로 직조되는데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축산업이 성하여 천성리에 호주산 면양의 종양장이 설치되었고, 원정리에는 종돈 · 종계를 생산하는 종축장이 설치되었다. 광업은 1900년에 영국인이 개발한 숭화리의 은산금광에서 금이 채굴된다.

평원선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순천∼맹산 간 도로가 이와 병행하고 있어서 교통은 편리하다. 유물 · 유적으로는 은산리에 350여 년 전에 신광미(申光美)가 건립한 담첨정이 있으며, 임강리에 임제사(臨濟寺), 천성리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동족 마을로 석교리에 광산김씨, 진산리에 하음 김씨와 광산 김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은산(殷山) · 진산(鎭山) · 이화(伊華) · 학천(鶴泉) · 마산(馬山) · 석교(石橋) · 금창(錦窓) · 원정(元井) · 숭화(崇化) · 명덕(明德) · 남옥(南玉) · 태평(泰坪) · 추평(楸坪) · 문창(文昌) · 안평(安平) · 천성(天聖) · 송현(松峴) · 정산(丁山) · 임강(臨江) · 서남(西南) · 창흥(昌興) · 모성(慕聖) · 인상(仁上) 등 23개 이가 있다.

자산면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6734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자산리이다. 본래 자산군의 군내면이었으나, 1908년에 자산군을 없애면서 순천군에 편입시켰으며, 1910년 자산면(慈山面)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운암면(雲巖面)이 병합되었으며, 1935년에 풍산면(豐山面)을 병합하였다.

면의 서부 평원군과의 경계에 자모산이 솟아 있다. 정융강이 동부를 지나면서 유역에 충적평야를 전개시켜 농경지로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조 · 콩 · 팥 · 밀 · 수수와 특용작물로 고추 · 깨 · 목화 등이 재배되며,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 특히 쌀 생산이 많다.

누에치기가 매우 성하며, 축산은 예로부터 농가소득의 원천으로 청송리에 원종우 생산 마을을 설정하여 우량우 생산 보급에 힘썼다. 양돈 · 양계 · 면양의 사육도 활발히 행하여진다. 광업으로는 1900년에 영국인이 개발한 자모산금광이 있어 금이 채굴된다.

평원선이 면의 동부를 통과하고, 개천∼대동 간 도로가 역시 면의 동부를 병행하고 있어서 동부의 교통은 편리하나 서부는 교통이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성남리자모산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조지(遷朝地)로 사용하고자 병기와 군량을 저장하였던 자모산성이 있으며, 1636년에 건립되고 1671년에 사액된 의열사(義烈祠)가 있어 고려 시대의 충신이었던 최춘명(崔椿命)김지저(金之佇)를 배향하였다.

동족 마을로는 향봉리에 수안 이씨, 고읍리에 수안 차씨, 기탄리에 나주 임씨, 청송리에 토산 궁씨, 신풍리에 밀양 박씨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중학교 2개교가 있다.

자산(慈山) · 운곡(雲谷) · 부용(芙蓉) · 융덕(隆德) · 신풍(新豐) · 인풍(仁豐) · 용암(龍巖) · 청송(靑松) · 생지(栍池) · 기탄(岐灘) · 용연(龍淵) · 풍덕(豐德) · 송림(松林) · 청룡(靑龍) · 용문(龍文) · 신평(申平) · 자로(慈老) · 덕반(德盤) · 신암(新巖) · 운흥(雲興) · 향봉(香峰) · 중평(中坪) · 제일(第一) · 고읍(古邑) · 백전(栢田) · 성남(城南) 등 26개 이가 있다.

후탄면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8,602명(193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후탄리이다. 본래 귀후면(歸厚面) · 오탄면(五灘面) · 월탄면(月灘面) 등 3개 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3개 면을 병합하여 후탄면(厚灘面)이 되었다.

동북쪽 은산면과의 경계에 영원군의 소백산에서 발원한 정융강이 남류하고, 남서쪽 사인면과의 경계에는 자산면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흘러 정융강과 합류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 쌀 생산이 제일 많고, 조 · 콩 · 팥 · 밀 · 수수 등과 특용작물로는 면화 · 고추 · 깨 등이 생산된다. 누에치기는 예로부터 농가 경제에 중요한 구실을 하여왔으며, 도내에서 모범 지역으로 개량뽕밭과 간작뽕밭을 조성하여 활발히 이루어진다. 생산되는 누에고치는 대개 가내공업으로 명주를 직조하여 농가 소득 증대에 한몫을 한다.

축산 역시 활발하여 원종우 생산 마을을 설정하여 우량우 사육에 힘썼고, 양돈 · 양계 · 면양의 사육 등을 겸하여 농가 소득 증대에 큰 몫을 하였다.

교통은 사인면에서 강동군 봉진면에 연결된 도로가 면의 남부를 통과하며, 사인면에서 성천군의 영천면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동족 마을로 득룡리에 봉인 최씨, 양포리에 용인 이씨 · 수원 백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후탄(厚灘) · 입석(立石) · 화오(和五) · 양포(兩浦) · 오탄(五灘) · 용흥(龍興) · 석정(石井) · 합포(合浦) · 월탄(月灘) · 고삼(庫三) · 득룡(得龍) · 학림(鶴林) · 반룡(盤龍) · 현룡(見龍) 등 14개 이가 있다.

광복 후의 순천군

1952년 12월 순천읍 · 내남면 · 사인면 · 후탄면 전부와 자산면 · 선소면 · 북창면 일부가 합쳐져 새로운 순천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1967년 10월 용지리 일부를 분리 풍덕리에 편입하였고, 1974년 5월 은산군을 흡수, 병합하였다. 그 뒤 1983년 11월에는 순천시로 승격되었다. → 순천시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增東國輿地勝覽」
「順川邑誌」
「平安南道誌」(平安南道誌編纂委員會, 1977)
「以北5道30年史」(以北5道委員會, 1981)
「北韓文化財實態와 現況」(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1985)
「人物의 고향」-北韓篇(, 中央日報社,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노도양·이원순·박연두·김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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