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초(德初). 아버지는 이세형(李世亨)이다.
1682년(숙종 8) 천안현감(天安縣監)으로 고을을 잘 다스린 공이 인정되어, 천안현이 군(郡)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청에 따라 격식을 깨트리고 군수(郡守)로 승진하였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86년 사간원정언이 된 뒤 집의·지평·장령을 거쳐 헌납에 임명되었다. 1689년 삼사(三司)의 신하로서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소를 올린 송시열(宋時烈)의 토벌을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1694년에는 장령으로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은 상신(相臣: 삼정승의 별칭) 민정중의 극형을 발의한 대관(臺官) 김원섭(金元燮)·조식(趙湜)·윤정화(尹鼎和) 등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95년 집의·보덕·사간을 거쳐 이듬해에는 암행어사로 함경도의 민정을 시찰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