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돈녕부도정, 종성부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심여(心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4년(영조 20)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장령|부교리|헌납|돈녕부도정
관련 사건
경신대출척
정의
조선 후기에, 돈녕부도정, 종성부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심여(心汝).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이며, 복평군(福平君)이인(李㮒)의 손으로, 할아버지는 완천도정(完川都正) 이엽(李燁)이고, 아버지는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이며, 어머니는 임서(任緖)의 딸이다. 전흥부수(全興副守) 이염(李埝)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3년(영조 3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다음 전시직부(直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가 급제하자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임금께 아뢰어 그의 조부인 복평군 인의 관작(官爵)을 다시 복구시켰다. 복평군은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한다는 무고를 받고, 복선군(福善君)·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역모죄로 유배, 사사되었었다.

1763년 특명에 의해 설서(說書)로 발탁되고, 1766년 6품에 올라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종실의 가까운 종족(宗族)이긴 하지만 나이가 어린데다가 학문이 거칠고 재능이 맞지 않아서 시종(侍從)의 직에는 마땅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68년 지평을 거쳐, 수찬·장령·부교리·헌납, 돈녕부도정·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을 거쳐, 다음해 종성부사(鐘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청나라 사람이 경원개시(慶源開市)로 가는 길에 종성에서 화재로 화물을 모두 태우는 일이 생기자 외국에 수치를 끼쳤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792년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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